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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창영 Oct 16. 2016

Underground Boy

다방집 소년(연재소설 #4(상))

 어느새 그날로부터 2년이 흘렀다. 상황은 아시다시피 나는 이 지하 다방집에 계속 살고 있고 무슨 인연인지 고등학교에 와서도 경일이의 등에 신세를 지며 모자란 아침잠을 보충하고 있다. 86 아시안 게임을 한 일주일쯤 앞둔 일요일 오전이라 늦잠을 자려고 했다. 학교에서야 늘 마음 졸이며 조는 게 일이라지만 집에서야 일요일 아니면 언제 또 늦잠을 자겠는가? 나는 오전에는 도저히 힘을 못 쓰는 다방집 도련님이다. 토요일 오전 수업 내내 경일이 녀석 뒷자리에서 잠을 너무 푹 자서 밤에 잠이 잘 안 왔다. AFKN에서 소울 트레인을 보고 나서야 어렵사리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간밤 꿈에, 그날 그러니까, 중 2 때 경일네 이백 칸 고택을 다녀온 토요일 저녁에 죽어 있었던 하얀 잉어가 백룡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는, 아니 특이하게 이 용은 D시 앞 자기를 묻어주었던 푸른 바다 위를 힘차게 물을 튀기며 날고 있는 꿈을 꿨다. 분명 용꿈이다. 이것은 복권을 사야 한다는 명백한 증거다. 이따 오후에 집 근처 시립 도서관을 가는 길에 복권 한 장 사야 하겠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그 큰 잉어가 죽고 난 이후로 우리 다방집에서는 더 이상 잉어를 키우지 않았다. 몇 해를 정성 들여 키웠었고 팔뚝만 한 크기로 우리 다방집의 무게 중심을 잡아주던 잉어였다. 더군다나 그날 위험에 처한 나를 구해주면서 자신의 목숨을 잃은 것이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고마운 잉어를 다음 날, 구도심 항구 옆 바닷가 절벽 근처에 고이 묻어주었다. 거기서 지금 내가 다니는 남녀공학 학교까지는 숲길을 따라 걸어서 5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림으로 소나무가 많은 숲이었고 숲 바로 아래는 절벽처럼 가파르게 보였다.

 한편으로 해안을 따라 무장공비와 간첩의 침투를 막는 철조망이 펼쳐져 있었고 각 초소마다 삼엄하게 경계 근무를 서는 군인들도 보였다. 당시에 잉어를 묻으면서도 오른 팔뚝에 통증을 느꼈었다. 시꺼먼 멍도 그렇고 마음속 일이 어떻게 바깥 신체에도 영향을 주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점차 마음속 일이 마음속에서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잉어를 다 묻어주고 부디 다음 생에는 바다의 용으로 태어나길 빌어주었다. 그런데 아마 간밤의 꿈은 그 잉어가 내 바람대로 바다의 용으로 다시 태어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상서로운 꿈이었다. 잉어를 묻어 주었던 그 절벽 앞 푸른 앞바다를 희디 흰 백룡이 아주 기쁜 듯 철퍽철퍽 바닷물을 튀기며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우리 남녀 공학 고등학교를 휘익 유영하고는 서쪽 하늘로 날아올랐다. 아이들은 창문 밖으로 날아가는 용을 쳐다보는 그런 장면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500원짜리 올림픽 복권이다. 삼천만 원이었던 당첨금은 이제 무려 일억 원이 되었다. 옛날에는 주택복권이었는데 어느 날부턴가 올림픽 복권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뭐든, 그 돈이면 엄마랑 이 다방집을 벗어나 경일네 한옥은 아니더라도 지하가 아닌 지상에 번듯한 집을 하나 갖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특별한 능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또 그 능력 때문에 어떤 목마름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고 1이 사내아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고작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늘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딜 가나 고양이들이 나를 반겨주었다는 점이다. 서울 하고도 잠실의 주공 아파트에 살 때도 놀이터에서 혼자 놀 때면 어디서 왔는지 모를 길냥이들이 같이 놀아주던 기억이 있다. 황금색 마징가 제트를 한 손에 꼭 쥐고 길고양이들하고는 주로 코를 마주치는 것으로 안부 인사를 나눴다.

 녀석들은 진정으로 나의 안부를 걱정하는 듯했다. 부모 없는 아이들과 시설에서 생활할 때도 그랬고 D시로 오기 전 잠시 우리나라 제2의 도시에 있는 한 시장통에서 살 때도 그랬다. 언제나 고양이들은 보이지 않게 내 주변을 맴돌았고 내게 나타났을 때는 무척이나 친절했다. 여기 D시에서도 가끔 우리 다방집으로 고양이들이 방문을 하곤 했다. 둘이 같이 오기도 하고  한 마리씩 오기도 했다.

 간혹 오늘 같은 일요일 아침에 엄마나 레지 누나들이 목욕탕을 가서 다방집에 나 밖에 없을 때는 비상구 문을 탁탁 치며 야옹거리며 나를 깨우곤 했다. 잠결에 문을 열어주면 한동안 다방집 홀에서 놀다가 어항 물을 마시고는 나와 코를 맞추고 이 다방집을 떠났다. 그러면 기가 막히게 엄마와 레지 누나가 목욕탕 냄새를 듬뿍 풍기며 다방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흔치는 않지만 고양이가 깨우지 않는 일요일도 있는데 그러면 대개 늦잠을 더 잤다. 그렇지만 엄연한 다방집 마담인 엄마는 일요일에도 가능한 9시 반이면 목욕탕을 다녀와 다방집 문을 열었다. 잠이 부족한 나는 홀을 대략 정리하고 내실 옆 쪽방에 가서 잠을 더 청하곤 했다.

 그런데 항상 특이하게 생각했었는데 엄마는 다방집 내실에서 잘 때면 언제나 내실 형광등을 켜놓고 잔다. 아무도 불을 켜고 자라고 얘기하지 않았지만 불문율처럼 그렇게 했다. 아마도 엄마는 잠이 깼을 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랬는지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부터는 엄마랑 따로 자기 시작했다. 나는 불을 끄고 자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엄마가 있는 방에는 다이얼을 돌려야 열 수 있는 꽤나 든든하고 큰 금고가 있었다.

 내실 장롱 옆에 있는 그 큰 철제 금고는 정말 문을 열면 사람 하나는 너끈하게 들어갈 정도로 컸다. 국민학교 6학년 정도 때였는데 가끔 잠을 자다 깨 엄마가 안 보이면 어디를 갔나 찾게 되었는데 어쩌다 그 금고에서 스르르 문이 열리고 엄마가 나오는 장면을 비몽사몽간에 본 기억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엄마에게 왜 금고에서 나왔냐 물어보면 네가 꿈을 꾼 것뿐이라고 우겼다. 잠시 억울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넘어갔다. 시설에 다녀오고 나서부터 나는 예쁜 엄마 말은 무척 열심히 잘 듣는 편이다. 다시는 그런 곳에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가 됐든 일요일 9시 반쯤이면 말했듯이 엄마가 문을 열기도 하고 일찍 잠이 깬 할아버지 손님들이 쌍화차를 드시러 오셔서는 문을 두드리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홀에서 더 오래 잘 수도 없었다. 간혹 엄마가 목욕탕에서 너무 오래 머물다 오게 되면 내가 그 할아버지들에게 쌍화차를 만들어서 대접을 해야 했다. 할아버지와 나나 엄마를 기다리다 보면 할아버지께서 성화를 내신다.


 “이마담 와 이래 안 오노?”

 “…”

 “허허! 쌍화차 한 잔 마실라 카니까 와이리 어렵노!”

 “쌍화차 드려요? 어르신!”

 “니가 끓인다꼬?”

 “네!”

 “다방집 3년이면 개도 커피를 끓인다카더만 함 끓이 내봐바! 험험!”

 “네!”


 쌍화차! 어떻게 만드냐면…… 음… 우선 엄마가 다방 물품을 주로 거래하는 재료상에서 가져온 쌍화차 원액병을 주방 싱크대 위 선반에서 찾는다. 거기서 원액을 크게 한 숟가락 정도 떠내고 나서 차 한 잔 정도의 물을 담을 수 있는 양은 이브리크(*밑변이 6센티, 높이가 7센티 정도인데 길쭉한 손잡이가 달린 작은 양은그릇인데 사실 여기에 커피도 끓여내고 유자차나 율무차와 생강차 가루에 부을 물도 끓였다. 한 잔정도의 물을 끓이기 딱이어서 우리 다방집 만능 용기!)에 담는다. 여기에 적량의 물을 부어 풀어 주면서 가스레인지에  끓였다.  

 어느 정도 쌍화차 원액을 푼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물을 조금 더 붓고 잣과 호두 그리고  땅콩가루를 뿌리고 나서 미리 썰어둔 대추를 넣고 물이 완전히 끓고 나면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고 설탕을 넣어 단맛을 추가해 나름 옥색 청자 찻잔인 데다가 승천하는 용문양까지 새겨진 기품 있는 쌍화차 전용 잔에 부어 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과정이 남는데 계란 노른자 올리기 신공!

 신선한 날계란에서 계란 노른자만 정확히 솎아 내 쌍화차에 올리는 게 관건이다. 만약 동그랗게 계란 노른자를 올리지 못하면 실패!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이건 쌍화차의 생명 같은 것이다. 화룡점정이라 하던가! 아!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다방집에서 산 다방집 도련님인 나 역시 여러 번의 실패를 맛본 끝에 쌍화차에 완벽하게 동그란 노른자를 올릴 수 있게 됐다.

 요즘처럼 환절기가 되거나 몸이 허할 때 나를 위해 쌍화차를 끓여먹기도 했다. 한약 냄새가 나긴 하지만 일단 맛있고 먹고 나면 웬일인지 힘이 났다. 계란 노른자의 비린내가 싫은 손님은 노른자를 빼 달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 다방집에 온 손님 중에 계란 노른자를 빼 달라고 한 손님은 몇 해간 본 적이 없었다.

 밤마다 어디서 그렇게 맥주를 드시는지 하루가 다르게 살이 붓는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무조건 큰 주전자에 물을 가득 붓고 끓였다. 엄마가 없을 때는 내가 끓였다. 다방 재료를 대주는 업소에서 엄마는 꼭 마스터 원두커피(2kg)와 브랜드 원두커피(2kg) 딱 두 가지 대용량 원두 가루를 동시에 주문했다.

 이 원두가루들이 우리 다방집이 돈을 버는 가장 밑바탕이 되었다. 이 커피 원두 가루들은 업체에서 주는 각각의 큰 원통형 깡통에 담아 플라스틱 뚜껑을 꼭 닫아서 밀폐해 둬야 했다. 한번 개봉된 원두 가루들은 밀폐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우리 다방집이 매번 드립 커피를 파는 것은 아니니 가능한 커피 원두 특유의 향이 날아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매우 큰 스테인리스 주전자의 물이 맹렬히 끓으면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그리고 업소용 대용량 빨간색 플라스틱 드립퍼에 대용량 종이필터를 넣고 각각 종류가 다른 원두커피 가루에서 빨간색 플라스틱 컵으로 각각 두 컵씩을 넣고 큰 주전자의 끓는 물을 부어 둥근 대용량 유리 커피 포트에 커피를 내렸다. 그렇게 우려낸 커피를 아까 말한 수도 다방집 전용 양은 이브리크에 한 번 더 끓여서 하얀색 커피 잔에 넣고 설탕 두 스푼, 커피 프림 두 스푼을 듬뿍 넣어서 손님에게 대접했다. 이게 우리 다방집 커피 제조법이다. 손님의 취향에 따라 크림과 설탕은 더했다. 빼는 건 없다. 지금까지 우리 다방커피를 그냥 오리지널로 먹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우리 다방집 커피의 특징은 끓는 물을 붓기 전에 꼭 꽃소금을 한 꼬집을 해서 원두커피 가루 위에 뿌렸다는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다만 엄마는 소금을 아주 조금이라도 넣었다. 물론 나도 그렇게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우리 다방집 엄마표 모닝커피는 D시 신도심에서 모닝커피로는 최고라는 소문이 났었다.

 언젠가부터 일요일 늦은 아침에는 우리나라 제2의 도시에 있는 큰 국립대학에서 강의를 하셨다가 은퇴하시고 D시의 신도심으로 이사를 오신 팔순에 가까운 노교수님이 오셔서 쌍화차를 드시곤 했다. 동네 할아버지들도 그랬지만 일요일 아침에 똑같은 시간에 오셔서 똑같이 쌍화차를 드셨다.

 연세를 많이 드셔서 그리 말을 많이 하시지는 않았고 손에 힘이 없으셔서 혹시라도 뜨거운 청자 쌍화찻잔을 놓치시는 건 아닌가 조마조마하게 바라볼 때도 있었다. 조그만 체구에 빽빽한 흰머리를 정갈하게 가르마를 하신 양복을 입은 노신사가 두 손으로 뜨거운 찻잔을 드시고 아슬아슬하게 쌍화차를 입에 대시기까지의 느리고 정교한 손떨림은 인디애나 존스나 람보 같은 영화 시리즈에서 보는 그런 스릴 하고는 비교조차 할 수없이 아슬아슬했다.

 그래서 그 교수 할아버지께서 한 주라도 안 오시면 어디 아프신가 하다가 또 그다음 주에 오시면 마음이 놓이곤 했다. 손님과 주인의 관계에서 서로 안부를 챙기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그분은 전형적인 학자의 모습이었고 보통은 조용히 다방집 큰 어항 옆에서 신문이나 책이라도 읽고 계시면 다방 전체에 지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게 하셨다. 하필 다향 만당(茶香滿堂)이라는 글씨가 벽돌 벽지를 바른 맞은편 벽 중앙에 붙어 있었다.  

 우리 다방집의 일요일 아침은 때때로 학식 높으신 교수 할아버지와 함께 차분하게 시작한다 치면 토요일 밤의 다방집은 그와 상반된 열기로 가득 찼다. 보통 토요일은 비교적 상황에 따라 늦게까지 문을 열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나라 제2의 도시 근방이라 그런지 우리 다방이 있는 D시 중심부 그러니까 우리 다방집 맞은편에 소위 카바레라는 게 생겼고 이제는 제법 손님이 끓었다. 미용실에서 꽤 돈을 들여 파마머리를 제대로 한 중년의 여성들이 D시의 센 바닷바람을 맞으러 삼삼오오 택시를 타고 그녀들만의 해방구를 찾았다.

 그러다 보니 토요일 오후 자습을 마치고 학교에서 자습을 하다가 저녁 무렵 우리 다방집에 돌아오면 참 가관이 아니었다. 카바레에서 춤을 추는 무희들이나 번쩍번쩍 빛이 나는 구두와 칼 같이 주름이 잡힌 바지를 입어서 오히려 제비족임에 뻔한 남자들이나 춤바람이 난 아줌마들이 모여 진한 향수 냄새와 뿌연 담배 연기로 모두 함께 동화되었다. 정말이지 이 시간은 D시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톡식(Toxic)’하면서도 매우 선정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아주 매혹적이면서도 결국은 몽환적으로 느껴졌다. 또한 내가 중학교 입할 할 때부턴가 벽돌 깨기나 갤러그 같은 오락기가 다방집에 들어왔다.

 얼마 전에는 매우 섹시한 카우보이 누나의 옷을 하나씩 벗기는 카드 게임기까지 들어왔었다. 다방집 도련님으로서 이 카우보이 누나의 옷을 모두 벗기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며칠 밤을 새 결국 게임의 끝을 보고 말았다. 1학년 1학기 말에 수학 점수가 괜히 떨어진 게 아니다. 결국 게임의 끝은 허무했다. 7을 중심으로 다음 카드의 숫자의 높고 낮음을 맞추는 게임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여섯 단계의 높고 낮음을 다 맞추었지만 카우보이 누나의 주요 부위를 막고 선 샴페인 병 하나를 보고 말았다. 예상할 수없었던 결말에 망연자실했다. 그다음엔 이런 전자 게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지금은 7이라는 숫자가 일련 된 줄이거나 대각선 줄이거나 세 개가 연달아 맞으면 잭팟이 터지는 전자 슬롯 머신 같은 사행성 전자오락 게임기가 슬그머니 다방집 제일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벌금을 맞을 수도 있는데 장사가 안 되는 탓에 엄마가 무리수를 두었다. 사내들은 뭐가 신기해해서인지 돈을 딸 수도 있는 하지만 결국 돈을 잃을 수밖에 없는 이 슬롯 머신 게임기에 빠졌다. 이분들 덕분에 가끔 근처 신협에 십몇 만 원 어치 백 원짜리를 들고 가 모두 만 원짜리 지폐로 바꿔오기도 했다. 그렇게 내 밀린 등록금이 해결됐다.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일언반구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도움도 없이 여자 혼자 아이 하나 키우는 문제는 쉽지 않다.

 아무리 돈을 잃는다고 해도 다방 구석에 앉아 게임기 위에 동전을 쌓아놓고 담배를 뻑뻑 피우며 백 원짜리 동전을 넣고 슬롯머신의 단추를 연신 누르는 저 사내(배씨라 불리는 사내인데 내가 좀 싫어한다. 비열한 데다가 음흉한 구석까지 있어서 다방 집에 들어서면 바짝 긴장이 되는 인간이다.)까지 더 한 이 다방 집이 내뿜는 토요일의 밤의 열기는 D시에서 누릴 수 있는 환락의 축소판이었다. 결국 일주일 중 이 시간이 되면 담배연기까지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우리 다방집은 세상과는 판이하게 다른 곳으로 변해 있었다.

 더군다나 나는 이런 토요일 저녁에 다방집에 귀가를 하면서 “와!” 하면서 깜짝,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리 86 아시안 게임을 하는 데다가 전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을 알릴 88 올림픽을 앞둔 나라라 주택 복권 대신 올림픽 복권을 파는 나라가 됐다지만 너무 세련된 게 아닌가 혼자 놀라곤 했다. 가끔 이 곳까지 공연을 오는 백남봉 같은 연예인을 보기도 했다. 백남봉 씨는 내가 우리나라 제2의 도시에 온 지 얼마 안 돼 엄마랑 시내 유명 돼지국밥집에 갔다가 옆 자리에서 본 적이 있어서 반가웠다. 아시다시피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 말 한마디 붙이지 못했다. 이럴 때면 국민학교 내내 다녔던 웅변 학교에 받친 돈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쨌든, “아이고, 이 집 도련님 왔네! 안녕!” 소위 나를 보자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성전환 여성을 처음 본 것도 요즘이었다. 꼭 무대복을 입지 않았어도 무척 화려한 무희 차림의 여성 여러 명이 우리 다방집에 오곤 했는데 유독 그녀만은 정말 튀었다. 그녀는 아주 화장이 아주 진했고(그녀의 맨얼굴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담배를 많이 피웠고 여자인지 남자인지 헛갈렸고 옷이 무지 화려했으며 목소리가 허스키했고 몸매는 정말 예뻤다. 학교에서 돌아와 가방을 메고 다방집 홀을 지나고 있었을 때, 마침 그녀가 내 앞에서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담배 가치를 주울 때 거의 자신의 유방을 드러낼 뻔했다. 그때 나는 입을 막고 비명을 참았다. 그녀의 선홍빛 젖꼭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슴에 시선이 꽂힌 나와 눈이 마주쳤어도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의 그녀가 길 건너 카바레에서 공연을 하는 스트립 댄서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춤은 춰야 늘어! 야!” 그녀가 다른 무희들에게 전라도 억양으로 이야기를 했다.

 “넌 연식이 돼 잔해!! 좀 있음 늘어!”

 “어머! 고마워요. 언니!”

 “내가 전라도 쪽은 절대 공연 안가!”

 “왜요? 언니!”

 “우리 부모님이 내가 이런 거 하는 줄 알면 어쯔겄냐! 부모님 모르는 거시 낫지”

 “뭐 우리도 그렇잖아요. 언니! 우리도 친구 안 만난 지 진짜 오래됐어요!”

 “야! 친구 만나 봐야 할 야그가 없어! 야!”

 “뭔 재미가 있겄냐!”

 “아! 맞아요! 다 결혼해 갖고 아이 야그만 허니께!”

 “어짰든 지금 니들 스스로 이겨내야 혀! 춤을 하는데 옷 벗는 건 암 것도 아녀! 춤사위만 괜찮으면 괜찬해! 너는 춤추는 게 좋잖혀!”

 “맞아여! 언니! 무대에서 재밌지 않으면 뭣 하러 이 고생을 한다여!”

 “이거슨 누가 시켜서 그런 거이 아녀! 재밌어야 한다니께!”

 

 사람은 겉으로만 보면 안 된다는 걸 이들의 대화로 절실히 느꼈다. 무지 진한 화장에 싸구려 향수 내음이 진동했어도 결국 이들은 춤을 사랑했고 무대를 사랑했다. 그녀와 춤에 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나머지 두 여성이 훨씬 더 섹시하고 아름다웠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트랜스젠더인 그녀가 아무리 진하게 화장을 했어도 그녀의 체취를 맡으면 나는 그녀가 남자였던 시기의 영상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 마음속에서 그녀의 인생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순식간에 그녀가 그였던 시절의 고뇌가 펼쳐졌다. 남자 고등학교에서 동성 친구를 좋아했고 고백했고 당연히 거절당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 이 세계에 발을 디뎠고 어렵사리 일본으로 가서 돈을 모아 기어이 그녀가 되었다. 어린 일본 남자와 동거를 하던 그녀가 얼마 전 한국에 돌아온 것은 그녀의 연애가 파탄이 났기 때문이었다. 여기 스트립 댄스 후배들과 팀을 이루어 서울을 비롯해 유수의 대도시를 순회하고 있었고 D시의 카바레도 한국을 떠나기 전 우리나라 제2의 도시에서 댄서와 웨이터로 인연을 맺은 카바레 영업부장과의 인연이 작용했다. 언제 봤는지 나를 보고 우리 다방집에 단골이 되었다. 내가 그녀의 옛 일본 애인과 비슷한 분위기였던 거다. 그녀는 나를 도련님이라 불렀고 나는 그녀를 보면 그저 수줍어 얼굴이 붉어졌다.     

 종종 서울에서 온 다방년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지만, 이 답답한 바닷가 소도시에서 우리 다방집같은 해방구도 없다고 자부한다. 지하 다방집이라는 단점이 있어도 또 이런 장점도 있기 마련이다.  하긴 곧 D시가 우리나라 제2의 도시에 포함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게 뭔들…. 아무리 우리 다방집 주소가 우리나라 제2의 도시가 된들 여기가 서울이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여우가 태어난 곳을 향해 머리를 향하고 죽듯 언젠가 나는 내가 태어났던 서울로 돌아갈 거라 다짐했다.

 아차차! 그런데 밤 11시 반을 전후해서 이 모든 것들은 귀신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그때부터 나는 뿌연 담배연기와 향수 냄새와 화장품 냄새와 포마드 기름 냄새와 인간 본연의 체취들을 환기시켰다. 정말이지 이들이 남긴 여러 체취들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체취들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러웠다. 마치 여러 인생들의 영상이 미친 듯 내 마음속에서 빠르게 흘러지나 갔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밤 12시가 넘어서는 남녀 단둘이 오는 아베크(avec)족 연인들이나 코가 빨개지도록 술에 취한 타코(문어=대머리) 아저씨 손님들이 있었다. 늘 그렇듯이 이 취객 아저씨와 실랑이를 하는 소란한 밤을 맞이한다. 이 지긋지긋한 시간이 흘러 어찌어찌 상황이 정리가 되면 AFKN의 <소울트레인(Soul Train)>에서 나오는 경건한 흑인음악과 춤으로 토요일 밤을 마감했다.       


다방집 소년 4 (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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