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nctuary Oct 02. 2024

#011(D-90)취향의 고집?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얼마 전에 집근처에 커피가 맛있는 작은 카페를 발견했는데 심지어 브런치까지 맛있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단골이 되었다.


오전 10시,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오픈해서 영업중이라고 표시되어 있어서 그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많은 브런치카페가 인테리어만 요란하고 음식은 비싸기만 해서 웬만하면 브런치를  사먹으려고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곳은 잡곡빵을 오븐에 바싹 구워서 잘 익은 아보카도와 베이컨을 넣은 샌드위치를 만들어주는데 퀄리티가 꽤 좋았다. 게다가 가격도 착했고.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카페 문을 열려는 순간, 문이 닫혀있고 불도 켜있지 않았다. 아뿔싸! 로컬 카페의 단점이 이런 거다. 주인장의 상태에 따라 종종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 네이버에도 잘못 정보가 올려져있어서 나는 예기치 않게 헛걸음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아쉽기는 했지만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뭔가 사정이 생겼나보구나. 그럼 뭐 여기 아니고 다른 곳에 가보자.  이 집 커피와 빵이 맛있는 건 맞지만 사정이 안되니 근처 다른 카페도 한번 찾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나 같으면 상상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꽤 오랫동안 내 취향을 고집하면서 지내던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하루를 시작할 수 없고 그 커피는 인스턴트여서는 안되고 반드시 원두커피여야하며 가능하면 내가 선호하는 특정한 원두여야했던 때가 있었다. 그 외에도 어떤 음식점이나 카페, 특정 브랜드의 식품이나 특정 장소 등 나의 취향을 포기하면 마치 곧 삶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인양 유난을 떨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몇 년 전부터는 반드시 이거 아니면 안된다 하는 생각에서 조금 자유로워졌다. 내 취향의 고집이 나를 갇혀있게 하고 다른 가능성을 아예 차단시켜버릴 수더 있으며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게 하는 자물쇠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그건 하찮은 나의 자존심의 반영이라고도 여겨졌다. "난 이거 아니면 안돼"라는 태도는 나를 만족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유치하고 미성숙한 생각에서 비롯된 거 같았다.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영화계에서 일했을 때 프랑스의 대배우 잔 모로를 초대하는 자리가 있었다. 잔 모로를 수행하는 측에서는 '페리에' 라는 생수를 차갑게 온도를 낮춰서 테이블에 준비해주어야 하고 호텔방에는 이러이러한 물품이 반드시 있어야한다고 긴 목록을 보내온 적이 있었다. 당시엔  지금은 흔한  페리에를 구하기가 너무나 힘들었었다. 그래서 그 생수를 구하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고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개인의 취향을 존중은 하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없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경우, 어줍잖은 내 취향을 지금이라도 덜 고집하게 되서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나는 잔 모로 같은 대배우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일 뿐. 꼭 이거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는 건 나를 가두어놓는 것일 수도 있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주어진 그 상태에서 만족하고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 가장 인생을 잘 누릴 줄 아는, 인생의 고수인 사람이다. 


내가 존경하는 P신부님은 종종 사도 바오로의 서간을 인용하시는데 바오로는 원래 로마시민권을 지닌 유다인 중 최상위층 출신이었다. 후에 여러 섬과 지역으로 선교를 떠나면서 가난하게 지냈는데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나는 부유하게도 살 수 있고 가난하게도 살 수 있습니다." 라는 말을 하셨다고 한다. 부유하면 부유한대로 그것을 풍족하게 누리지만 가난하다해도 그 상황에서 가난한대로 충분히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어떤 환경에서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누리고 만족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도 인생에서 지금 내가 누리는 삶의 어떤  안정감을 뒤흔드는 위기나 시련이 얼마든지 들이닥칠 수 있다. 아니면 혹시 내가 지금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어떤 큰 도전이나 모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인생은 그 어떤 것도 보장하지 않는다. 인생의 불확실성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경험하지 않는가. 나에게 어떤 큰 변화가 생겼을 때, 그때에도 내가 과연 지금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허둥대거나 걸려넘어지겠지. 그래도 얼른 다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란다.

10월의 둘째 날, 어제보다 뚝 떨어진 기온 속에 이제 가을의 한복판으로 훌쩍 와버린 계절을, 곧 우리 곁을 떠날 이 계절을 순간순간 더 사랑하고 누려야겠다고 다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010(D-91)10월의 첫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