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재난문자와 빗소리
10월의 첫날은 새벽 6시 16분, 요란하게 울리는 <긴급재난문자>와 함께 시작되었다. 내 거주지 근처 공원에 폭발물이 설치의심신고가 접수되어 전면통제한다는 문자였다. 이런 특이한 사유로 재난문자를 받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사실 알람이 울리기 전부터 창밖으로 들리는 빗소리에 새벽부터 깨어있기는 했지만 억지로 깨워져서(?) 일어난 기분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엇지만, 유난히 무더웠던 올해 여름 하루하루는 그렇게도 길게 느껴지더니, 지난 주부터 날씨가 서서히 서늘해지고 지내기에 딱 좋은 쾌적한 온도가 되고부터는 하루가 1.5배속으로 지나가는 기분이다. 9월도 언제왔는지 모르게 슬그머니 지나갔는데 벌써 10월이라니...믿어지지가 않는다. 이제 곧 춥다춥다 하며 두꺼운 옷을 꺼내고 머플러로 목을 감싸고 보일러를 켤 날이 멀지 않았다. 하긴 올해가 이미 90여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내 브런치의 글 타이틀 D-숫자 자체가 줄어드는 시간을 보여주고 있다.
이탈리아 공부가 다시 지지부진해지고 있고, 입시날짜가 3주 밖에 남지 않은 아이는 매일매일 지친 얼굴로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나는 또 여러가지 일상의 일들로 하루가 금방 지나가는 경험을 하고 있다. 연필사용이 두배 정도 늘어난 거 같다. 원래 빨리 깎는 편이라 부족한 상태가 된 적이 별로 없는데 요즘은 수요가 공급을 앞질러서 어제 낮에 서둘러 근처 화방에 가서 12타를 사왔다. 임시공휴일인 오늘과 개천절인 모레, 양일간 화실에서 다른 화실 아이들과 아침부터 밤까지 연합시험을 본단다. 어제 밤에는 현관에 들어서면서부터 인상을 쓰더니 무거운 아트키트와 화구를 내던지듯이 거실 테이블에 놓고는 제 방에 쏙 들어가 나올 생각을 안했다. 방에 따라 들어가서 아프다는 어깨와 퉁퉁 부은 종아리도 좀 주물러주고 다정한 말을 건네고 싶지만 모든 것이 다 귀찮은 듯 혼자있고 싶다고 해서 건드리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10월의 첫날인 오늘, 오전 내내 비가 온다고 했다. 40개의 연필과 10여 개의 지우개(지우개를 왜이렇게 많이 가지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 파레뜨와 붓통과 파란 물통 등등 들고 가야할 가방이 여러 개여서 우산을 들 손이 없어보였다. 나는 괜찮다는 아이를 기다리라고 하고 얼른 옷을 걸쳐입고 짐을 들어주기 위해 따라나섰다. 분명 시험 시간보다 훨씬 이른 시간인데 건널목 신호등이 켜지자마자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니 이 아이가 지금 마음이 급하고 긴장이 되나보다..생각되어 마음이 짠했다. 어수선한 마음을 털어내기 위해 집에 와서 실내에 있는 화분들을 모두 밖으로 꺼내두었다. 아침인데도 비가 와서 어두컴컴했다. 비를 맞아 물기를 머금고 맑게 빛나는 화초들의 초록빛을 가만히 바라보니 있자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내가 걱정해서 될 일이 아니다. 아이가 스스로 혼자 겪어내야 할 일을 옆에서 안타까워하지 말자고 내 마음을 다독였다.
어제는 화방에서 오는 길에 마침 약국을 지나치면서 아침일찍부터 밤 11시까지 강행군을 하느라 지쳐있는 아이가 생각나서 수험생에게 좋다는 마시는 액상 약들을 몇 가지 사왔다(영양제 냄새를 싫어해서 모든 영양제 거부). 아침에 눈치를 보며 내놨더니 인상을 쓰면서도 못이기는척 마시길래 웬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그렇게 화실에 간지 얼마 안되서 문자가 왔다. 엄마, 나 그 약 이제 절대 안먹을거야. 이제 곧 시험시작인데 계속 설사해.. 음.. 속이 상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가 없다. 아마 긴장한 상태에서 아침도 뜨는둥마는둥 속이 비어있는 상태에 안먹던 걸 먹어서 그랬던 거 같다. 내가 또 오버한 거 맞다. 차라리 그냥 아무 것도 주지 말고 놔둘걸. 우리집에 있는 나무나 화초는 내가 애쓰지 않아도 비맞고 바람맞고 햇빛 받고 잘 자라나는데 우리집 아이는 오히려 아이에게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뭔가를 더 해주려고 내가 허둥지둥하는 꼴이 갑자기 우습게 느껴졌다. 듬성듬성 구멍이 뚫려있는 돌담같은 부모가 되자고 해놓고 정작 현실에서는 아둥바둥 쩔쩔매는 내 모습을 보니 앞으로 큰일이다 싶었다.
P.S. 새벽 6시 폭발물 관련 재난문자가 온지 3시간 만에 다시 요란한 알람과 함께 후속 문자가 왔다. 공원이 이제 다시 개방되었으니 의심물체발견시 즉시 신고해달라는 당부와 함께. 그런데 갑자기 궁금해졌다. 폭발물 신고시 아마 공원 내 관리직원들과 사육사(?), 청소하시는분들 등등은 다 대피시켰을 거 같은데 그럼, 동물들은 대피시켰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