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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nctuary Sep 30. 2024

#009(9일차) D-92

내가 목숨을 내놓을만한 일?

볼 일이 있어 후배가 근무하고 있는 회사를 방문했다. 집에서 멀지 않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갔는데 나올 때는 많은 생각으로 마음이 묵직해졌다. 그가 근무하는 곳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라는 곳이다. CBCK라는 이니셜로도 불리는데 한국 천주교 전체의 공동선 증진을 위해서 사목 임무를 공동으로 조정하여 수행하도록 사도좌가 법인으로 설립한 상설기관으로, 한국 주교들의 회합이다.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대표적인 쉬운 예는 신자들의 <매일미사>책을 만들고 발행하는 곳이기도 하다. 


후배에게 부탁한 일을 그의 도움으로 잘 마치고 점심을 같이 하려고 했는데 마감할 일이 있어서 힘들겠다며 대신 지금 잠시 건물 투어를 시켜주겠다고 했다. 일반적인 회사가 아닌만큼 구석구석 구경할 거리가 많았다. 건물은 낡았지만 그 안은 아주 관리가 깔끔하게 잘 되어 있었다.

4층이었던가..흥미로운 사진을 발견했다. 커다란 작품이 걸려있었는데 사진으로만 보던 124위 복자품을 받은 순교자들을 그린 작품이었다. 큰 그림을 보니 인쇄물에서 작게 보던 것과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작가가 한명 한명 상상하면서 기도하면서 그린 그림을 다시 모아서 이렇게 완성시켰다고 한다. 실물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목이 잘리거나 기타 방식으로 죽음을 당했기, 아니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이 중에는 가장 나이어린 12살 소녀 이봉금 아나스타시아도 있고, 유일한 사제인 중국인 주문모신부도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 아래에는 124명의 이름이 적힌 표가 보였다. 숙연해졌다. 




순교(殉敎). 순교는 신앙을 위해 자기 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행위.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고 실체도 확실하지 않은 존재를 위해,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내 생명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루하루 수많은 작은 일들에도 흔들리고 무너지는 나약한 나자신을 생각해보면, 나는 무엇을 위해, 혹은 누구인가를 위해 내 생명을 내어놓을 수 있을까. 그것도 기쁘게.  내가 살아가면서 목숨을 내놓을만한 일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게 되는 시간이었다.


김형주 作 ‘새벽 빛을 여는 사람들’(124위 복자화)



지금으로부터 10년전 8월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방한하셨을 때 계획에 없이 갑자기 이 곳과 그 옆에 나란히 있던 메리놀 외방전교회를 방문하셔서 매스컴과 사람들이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원래는 한국주교회의 소속 주교들이 교황님이 계신 곳으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교황님이 본인이 움직이면 되는데 왜 여러 사람들이 움직일 필요가 있냐고 갑자기 행선지를 돌려 이 곳으로 오셨다고 한다. 


계단 옆 성모마리아상. 극미니멀리즘스타일이 인상적이다


CBCK 채플. 여기서 프란치스코교황님도 미사를 드리셨다고.




CBCK 건물 옆에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한국지부 건물이 있다. 사실 CBCK 건물 자체도 외방전교회 소유였다고 한다. 이 곳은 무려 1950년대에 세워진 건물이고 이 전교회는 한국에 선교온 지 무려 100년이 넘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이 곳 소속 사제나 수도자들이 이제는 숫자가 줄어들어서 더이상 이 건물을 운영하기가 어려워 서울대교구에 이 건물을 기부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는 특수사목을 담당하는 사제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워낙 건물이 낡고 오래되어서 곧 리모델링이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이 자리가 특별한 건, 건물 자체보다는 당시 선교 사제들이 정성들여 심고 가꾸었던 엄청난 규모의 아름다운 정원의 존재이다. 지금도 점심시간에는 일반인들이 이 곳에 와서 정원을 즐길 수 있도록 개방한다고 해서 후배와 이 곳에도 잠시 들렀다.  아쉽게도 우와 우와 감탄하면서 돌아보느라 바빠 사진을 찍지 못했다. 다음에 기회되면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 


메리놀외방전교회 한국지부 *사진 CBCK


https://youtu.be/ShOkPm-qljc?si=fheYAB4LpakxUaFc


100주년 소개 기사:

https://www.catholictimes.org/article/202305160179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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