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렛트 몇 개까지 써봤니...
이제 입시가 3주도 채 남지 않았다.
매일 매일 12시간 연습의 강행군.
미술을 해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아이 스스로도 음악이나 무용을 하는 친구들은 미술보다 다른 의미에서 좀더 힘들 거 같다고 말한다. 실기 시험이든 콩쿠르이든 어떤 대회이든 ... 일정한 시간이 정해져서 딱 그 시간에 정확히 자신의 기량을 보이지 못하면 안되는 그 짧은 시간을 위해 피나게 준비하는 일. 인생에서 그런 일을 준비하는 게 가장 긴장되고 피를 말리는 거 같다. 앞으로 성인이 되서 미술을 전공하게 될 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하게 될 지 모르겠지만 어린 나이부터 이런 치열한 경쟁의 장을 경험한 것이 아이의 인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 지 생각해본다.
채화 작업을 위해서는 파렛트에 미리 물감을 짜서 말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3년 전 미술을 시작할 때부터 아이 스스로 해오던 일이다. 연필은 너무 많은 양이 필요해서 손이 빠른 내가 깎아주고 있는데 물감을 짜고 말리고 닦아 내고 하는 작업은 힐링이 된다며 늘 혼자 한다. 색깔별로 파렛트 칸칸에 짜서 굳을 수 있게 말리고, 채화 연습 후 다른 색깔 물감이 묻어있고 지저분한 파렛트를 다시 붓으로 일일히 닦아내고 씻어내는 일은 시간도 걸리고 귀찮은 일인데 그래도 혼자 하는게 기특해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런데 요 몇 주 동안엔 밤에 집에 와서 쓰러지기가 일쑤여서 이 작업 할 시간조차 따로 내기가 어려운듯하여 내가 말려주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왜 파렛트가 4개일까? 화가도 아니고... 원래 2개 정도면 충분한데...
아이가 워낙에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편인데 최근 들어선 보리차 담아주는 텀블러를 2개 연속 잃어버리고 붓도 잃어버리고 방석도 어디갔는지 못찾겠다고 하고...우산은 뭐 말할 것도 없다. 그동안 에어팟도 두 번이나 잃어버렸다. 입시만 끝나기를, 그 때 한꺼번에 야단치려고 꾹꾹 참고 있다. 그런데 며칠 전 가방 안에 뭔가 잔뜩 싸들고 들어왔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파렛트를 2개나 실기실에서 발견했다고 의기양양하다. 이게 과연 신날 일인지.. 여튼 덕분에 파렛트는 무려 4개가 되었다. 어제 밤 11시에 화실에서 8시간 동안 모의 시험보고 와서 침대에 잠시 쓰러져있다가 좀비처럼 다시 거실로 스르르 나오더니 1시간 동안 붓으로 파렛트 닦고 물감을 짜넣은 후에 선풍기로 말려달라고 하고 잔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 콧노래부르면서 파렛트 정리하는게 한편으론 기특하기도 하고 아직 상태가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마음이 놓인다. 네 개의 파렛트를 선풍기 2대로 말리면서 이 입시의 파도가 잘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