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 1글 #2
나무는 위로 자란다. 바닥을 기어다니며 자라는 것을 우리는 나무라고 보통 말하지 않는다. 벚나무, 흔히 ‘사쿠라’라고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 중 하나는 대각선 방향으로 방사형으로 뻗은 가지이다. 중력을 받으면 수양버들처럼 가지가 마냥 쳐질텐데 벚나무의 가지는 많은 나무들처럼 중력으로부터 안간힘을 버티며 위로 뻗는 곡선을 그리고 있다. 마치 나뭇잎이 아닌 꽃이 먼저 나와서 봄을 맞는 그 에너지처럼 벚나무는 단단한 외피와 함께 햇빛을 받으러 가지가 뻗어나간다.
봄을 맞았던 꽃잎들은 따뜻한 햇볕 뒤에 으레 찾아오는 봄비에 자연스럽게 떨어진다. 흐드러지게 핀 하얀색, 분홍색 꽃잎들은 지고 짙은 분홍색깔의 가느다란 꽃받침만이 꽃의 흔적으로 남는다. 꽃이 지기 시작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나뭇잎이 나온다. 초록색과 분홍색 사이의 그 어딘가의 색깔로 나무는 칠해진다. 꽃이 만개할 때에 비해 사람들의 주목을 덜 받는 이때는 나무가 제일 약해질 때이기도 하다. 앙상한 가지만이 있을 때는 차라리 바람에 덜 흔들렸을텐데, 여름이면 따뜻한 날씨와 파란색 잎들이 우거져 나을텐데, 당연하지만 어색하게 찾아온 봄비 뒤의 나무는 작게 난 이파리 때문에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린다.
나무는 그렇게 올해도 작은 이파리들로 봄을 맞는다. 신기한 것은 작년에도 그랬고 그 전해에도 그랬다. 그리고 아마도 내년, 앞으로도 당분간 그렇게 해를 보내고 봄을 맞을 것이다. 사람의 시간은 한 해, 한 해를 신경 쓸 수밖에 없지만 크게 보면 마냥 그렇게 해단위로 끊기지만도 않는다. 거기에 비하면 벚나무는, 버찌를 먹은 어떤 동물의 변에 의해 씨앗이 땅에 심어지고, 해를 받기 위해 위로 싹을 틔우고 자라나면서 반복되는 일 년의 시간들을 정직하게 통과한다. 그게 여러분 앞에 보이는 봄비 이후의 볼품없는 벚나무이다.
시간이 된다면 매끄러우면서도 손가락 세 마디 정도에 한 번씩 날카로운 부분이 드러나는 벚나무의 외피를 만져봐라. 만져보면 보는 것보다 위로 자라는 이 봄나무의 힘을 강하게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작은새 피드백(같은 주제로 같이 쓴 작은새의 글 링크 https://brunch.co.kr/@4eeeac81451f407/15)
햇빛과 햇볕의 차이는 무엇인가? 나는 항상 두 단어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고 ‘햇볕’만 선호했던 것 같다. 오늘 지음의 글에서 ‘햇빛’이라는 단어를 보게 되어 좋다. ‘햇빛’은 좀 더 과학적잉고, 메마른 단어, 더 정확한 단어라고 느껴지고, ‘햇볕’은 더 감정에 치우친 단어라고 느껴진다. 그런 게 내 글과 지음의 글에서 맡아지는 냄새의 근원적인 차이를 불러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오늘도 지음의 글은 묘사들이 더 적확하다. 별 것 아니라는 것처럼 적확한 묘사를 뱉어내는 능력이 나에겐 없어 항상 놀랍다. 오늘도 지음은 20분 만에 글을 썼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어색하게 찾아온 봄비 뒤의 나무’, ‘일 년의 시간을 정직하게 통과한다’는 표현들이 마음에 닿아 좋다.
다만 오늘은 글의 제목과 첫 문단의 소재가 아주 좋은 반면에 끝까지 그 소재를 끌고가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오늘도 제목이 좀 바뀌었으면 좋지 않았을가 생각해본다. 일 년의 시간을 본인의 방식대로(중력을 거스르고, 정직하게 통과하고) 살아내는 벚꽃의 모습이 중심 소재인 것 같은데, 그래서 제목이 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