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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주영 May 17. 2019

인생이 널 돌아버리게 만들 때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와 앵그리 블론드




내가 좋아하는 래퍼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넘버 1은 변함없이 투팍(2PAC)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고 그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버렸고 그는 자신의 현재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었다.

 

1971년 생 뉴욕 빈민가의 조직원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투팍 샤커(Tupac Amaru Shakur)는 1996년 26세의 나이로 총격으로 사망했다. 투팍의 어머니는 뉴욕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그를 가졌다고 한다. 투팍 또한 그가 20살이 되던 해까지 여덟 번이나 체포되는 경력을 가졌으며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노래의 가사처럼 그의 친구들의 대부분은 갱스터였고, 그 역시도 갱스터였다.


나는 갱스터였다고 전해 줘. 내가 죽으면 아무도 울지 마’


몇 명의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죽었지?
젊은이들아 하늘에서 편안히 쉬거라,
갱스터들에게도 천국이 있단다.
내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
나의 친구들아, 우리밖에 안 남았다 …
그러나 인생은 흘러간다 …
 (중략)
 … 나에게 펜과 종이를 줘.
그래야지 내 죄들에 대해서 쓸 수가 있기 때문이지.
술병들도 줘.
내가 천국에 못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나는 갱스터였다고 전해 줘.
내가 죽으면 아무도 울지 마.

 ─ ‘Life goes on’ 중에서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투팍의 책을 보았다.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 투팍이 19살 때부터 쓴 72편의 시가 한편에는 원본으로 맞은편에는 번역본이 실려 있었다. 난폭한 갱스터 래퍼로 알려진 투팍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대 들었는가/ 콘크리트 틈새를 비집고 피어난 장미에 대해// 두 발 없이도 걷는 법을 스스로 깨달아/ 자연의 법칙 따위는 엉터리라는 걸 증명하였고// 누구도 믿으려 들지 않겠지만/ 장미는 꿈을 포기하지 않기에/ 신선한 공기를 호흡할 수 있다네/ 시선 주는 사람 아무도 없어도/ 콘크리트를 뚫고 자란 장미는 오래오래 피어 있으리!

─ <콘크리트에서 핀 장미〉전문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걸 수 없는 투팍, 그 이후로 내가 만난 최고의 래퍼는 에미넴이었다. 우리가 에미넴으로 알고 있는 그는 ‘Marshall Bruce MathersⅢ’ 이름으로 1974년 10월 17일에 태어났다. 가난했고, 가난한 가족들답게 이사를 자주 했고, 그 덕분에 전학 간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그의 최종학력은 고교 8학년 수료가 전부이다. 에미넴은 백인이다. 그리고 가난한 백인 쓰레기들도 흑인만큼이나 많으며, 피부색과 무관한 현실, 그것도 선택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그게 바닥을 친 인생이지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인생이 널 돌아버리게 만들 때
그때가 바닥까지 간 거라고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뭔가 절실히 필요할 때
그때가 갈 데까지 간 거야
네 인생이 결국 여기까지 전락했구나 느낄 때
절규를 할 만큼 미쳐 버리겠지만 눈물을 흘릴 만큼 슬프니까
 (중략)
내 인생은 공약으로 가득 찼어
그리고 깨져버린 꿈들로
무언가 나아지기를 바라지만
일자리를 얻을 기회는 전혀 없어

 ─ ‘Rock Bottom’ 중에서


에미넴이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는 백인이었기에 흑인 래퍼가 주류인 세계에서 그만큼 자신의 자리를 찾기 어려웠고, 그리고 ‘랩계의 이단아’로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음악으로만 만난 에미넴은 생김새야 어쨌든 간에 흑인 래퍼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다가 MTV 어워드에서 얌전하게 안경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있는 에미넴을 보았다. 저 멀쩡한 청년이 에미넴이란 말인가. 그리고 에미넴의 면모를 더 많이 볼 수 있었던 건 그가 주연한 영화 ‘8마일’에서였다.


‘나는 래퍼가 아니야, 난 영어로 말하는 악마라고’


영화 ‘8마일’은 에미넴의 준(準) 자전적 영화라고 한다. 그의 과거는 딱 그 영화의 상황만큼이었거나 그보다 나빴다. 태어나면서부터 생활보호대상자였고, 아버지를 몰랐다고 그는 자신의 책 《EMINEM-ANGRY BLONDE》에서 쓰고 있다. 자신이 쓴 랩의 가사와 그 음악을 쓸 때의 상황에 대해 구구절절이 쓴 책이다. 에미넴의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아무 쓸모도 없는 책이다. 영화에는 여동생이 있지만 1974년 생인 이 청년에게는 1995년 생인 딸이 하나 있다. 8마일 DVD의 스페셜 피처에는 에미넴이 영화를 찍으면서도 쉬는 틈틈이 음악을 만드는 심각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 주 동안 아이디어를 모은다. 좀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만 나는 종이 위에 잡다한 아이디어와 단어와 은유들을 적는다. 그걸 다 조합하게 될 거다. 이제 온전한 노래 하나를 다 쓰게 되면 종이 모서리에서 다른 모서리로 비스듬한 방향으로 쓰게 된다. 왜 이딴 짓을 하냐고? 나도 몰라, 하지만 늘 그렇게 한다.


Marshall Bruce Mathers Ⅲ이면서 에미넴인 것도 모자라서 그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는다. ‘Slim Shady. Slim Shady’는 그의 사악한 일면이며, 냉소적이고 험한 입을 가진 녀석이며 자신의 반쪽이라고 밝힌 바 있다. ‘나는 래퍼가 아니야, 난 영어로 말하는 악마라고’ (‘WEED LACER’ 중에서) 손쉬운, 그러면서 힘겨운 자아분열이다.


폴 오스터의《뉴욕 3부작》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 작가, 그리고 필명의 작가, 그리고 작가가 쓴 소설에 등장하는 1인칭 인물. 필명 뒤로 숨어버린 진짜 이름의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낸 소설 속의 주인공과 더 친밀감을 느낀다. 에미넴도 그런 것일까.


내 데뷔 앨범은 좌절한 MC로 지내던 첫 몇 년간 내가 겪었던 모든 것들의 종합이야. 난 사람들이 문제가 많은데도 자신은 전혀 아랑곳 않는 만사태평의 어린애로 나를 알아주기를 바랐어. 그들이 내 고통을 느끼길 원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그런 거 전혀 상관 안 하니까. 갈 데까지 다 간 인생이라고 떠들어대지만 사실 그다지 신경 안 쓰거든. 가사를 쓰기 시작하면 할수록, 이 슬림 셰이디라는 캐릭터에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그놈은 점점 진짜 나 자신처럼 되어가기 시작했다. 진실한 감정이 내 안에서 나와 그것들을 걷어차 버릴 배출구가 필요했을 뿐이야. 내겐 특정한 형태의 페르소나가 필요했어. 나는 이 모든 분노와 음험한 유머와 고통과 행복 모두를 쏟아내 버릴 구실이 필요했어.


래퍼들은 광포한 시인이거나 강렬한 소설가다


래퍼들의 세계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들 자신의 이야기를 속 시원히 까발리지만 그들은 하나도 시원하거나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 사랑해서 미칠 것 같다거나, 너 없이는 죽을 것 같다는 사랑 노래를 불러대는 이들이 훨씬 행복해 보인다. 세상은 사랑만 노래하고 있기에는 너무 불행하고 불운한 곳이라는 걸 그들은 너무 일찍 알아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불행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래퍼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래퍼들은 광포한 시인이거나 강렬한 소설가이거나 들려주는 영화감독이다.


내가 아는 그들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리고 그들이 뭐라고 지껄이건 간에 사실 나랑은 아무 상관없다. 내가 그들을 통해 느끼는 건 내가 그들처럼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그들만큼 화가 날 때가 있고, 그들만큼이나 세상에 대고 할 말이 많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들처럼 진짜 내 이름과 내가 만들어낸 또 다른 내 이름과 내가 만들어낸 가짜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야 할 운명이라는 걸 믿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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