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과 여자, 전화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 <세월>은 세 여자가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하루 동안 겪는 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1923년의 런던 교외에, 로라 브라운은 1949년의 LA에, 댈러웨이 부인으로 불리는 클라리사 보건은 1990년대의 뉴욕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모두 책과 관련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작가이고, 브라운 부인은 책벌레라 불릴 정도의 독자이고 집을 나간 후에는 도서관 사서로 일한다. 그리고 댈러웨이 부인은 책을 만드는 사람, 편집자이면서 작가인 리처드가 쓴 책의 등장인물이기도 하다.
나는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 <세월>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디 아워스>를 먼저 보았고, 그 영화를 보면서 내내 소설이 멋질 거라는 예감을 가졌다. 그리고 그 예감은 맞았다. 영화 <디 아워스>는 누구인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신한 니콜 키드먼의 창백한 모습도 인상적이고, 복잡한 심경의 변화를 표현한 줄리언 무어도 훌륭하지만 섬세함과 정확성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메릴 스트립이다. 소설 속에서 댈러웨이 부인 클라리스는 중성적인 인물처럼 느껴지는데 영화 속에서는 아주 풍부한 여성성을 갖춘 인물처럼 느껴진다. 소설 속의 인물이 배우들의 이미지와 연기에 도움받아 더 풍성해지고 선명해진 느낌일 뿐 다른 어떤 원작 소설과 영화보다 이 둘은 닮았다.
울프 부인도, 브라운 부인도, 댈러웨이 부인도 여자이다. 그들은 여자로 살면서 해야 하는 어떤 역할 속에서 고민하고 방황한다. 하인을 다루는 일 같은 어쩌면 사소 하달 수 있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울프 부인, 남편의 생일 케이크를 만들다가 좌절하는 브라운 부인, 오래전에는 연인이었으며 지금은 친구인 병든 리처드가 작가로서 큰상을 받는 날 파티를 준비하지만 그의 갑작스러운 자살 앞에서 허무해지는 댈러웨이 부인. 인생에서 스스로가 느끼는 진정한 즐거움과 가치는 다른 곳에 있는데 그들은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또 누군가로부터 받는 기대치를 완전히 외면하지 못하고 있다.
<세월>은 심심하다고 할 만큼 이야기가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점이 아주 좋았다. 꽉 채워진 물 잔처럼 아주 가벼운 움직임에도 흘러 넘 칠 것 같은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묘사하는 장면들과 인물 하나하나를 아주 오래 예민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거기에 바라보는 작가 스스로를 담지는 않는 건조한 느낌. 마이클 커닝햄은 클라리사의 생각을 빌려 소설 속에서 이렇게 말한다.
각자의 재능과 무제한으로 주어진 노력과 가장 호사스런 희망에도 불구하고 결코 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 책들을 쓰려고 안간힘을 쏟는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내고,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잠자리에 든다. 그 일도 이런 일들만큼이나 단순하고 일상적이다.
여자는 남자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이 여자의 이름은 코라 휩시. 휩시는 독일어로 예쁘고 귀엽다는 뜻이라고 한다. 일디코 폰 퀴르티의 장편소설 <여자, 전화>는 코라 휩시의 인생 33년 9개월 중 어느 하루 오후 5시 12분부터 12시 1분까지 6시간 49분에 대한 시간 단위, 분 단위의 적나라한 자기 고백 보고서이다.
코라 휩시는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 상대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자 다니엘 호프만이다. 친구 요한나를 따라간 파티장에서 코라가 노동자에 대한 연대감에 불타 화장실 청소부 아줌마에게로 음식이 가득 담긴 접시를 들고 가던 순간,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다니엘 호프만과 첫 접촉을 가진다. 그리고 우연히 병원에 들렀다가 그 남자 다니엘을 다시 만난다. 그녀는 과감히 전화번호를 적어 그에게 건넨다. 이제까지는 그녀의 가장 나쁜 면만을 보았으나 그녀에게도 좋은 면들이 있다는 말과 함께. 그녀는 지금 그의 전화를 기다리며 온갖 생각을 한다. 몹시 수다스러운 여자 친구의 연애를 전화로 생중계받는 느낌의 소설이다.
코라의 절친한 친구 요한나는 시기할 수 있는 한계선을 넘는 월급을 받는, 금발에 몸매가 좋은, 자신의 목표를 놓친 적이 없는, 하지만 그래서 많은 남자를 놓치는 그런 딜레마에 빠져 있다. 요한나는 말한다. 남자들은 여자의 전화를 기다리지 않는다고. 남자들은 기다리는 대신 다른 어떤 일을 한다고. 그리고 중요한 건 남자들이 기다림으로부터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고 싶어서 그 일을 하고, 실제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고. 정말일까?
남자들이 기다리는 대신 다른 어떤 일을 한다면, 여자들은 기다리는 동시에 어떤 일을 한다, 고 나는 말하고 싶다. 코라처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지난 연애의 실패에 대해 연구하고 친구들과 설문조사를 하기도 하고 이웃의 고민도 들어주고 괴롭고 귀찮은 것들을 정리하기도 한다.
<여자, 전화>는 숱한 연애의 법칙들과 솔직한 내면의 욕망 사이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이다. 코라 휩시는 잡지, 혹은 친구의 충고를 철저히 따른다. 첫 데이트 때의 행동양식, 이런 말은 해야 되고, 이런 행동은 하지 말아야 하고, 그리고 절대로 그에게 먼저 전화를 하면 안 된다. 그리고 전화가 오더라도 바쁜 듯이 그의 연락은 기다린 적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그런데 전화가 와야 말이지. 물론 전화를 기다리며 상심에 빠져 온갖 망상에 시달리는 건 여자뿐만이 아니다. 이 소설에서도.
한 권의 책에 하루가 담겨있을 뿐인데, 그 하루는 변화이다. <세월>의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고민을 한다.
보통 여자의 삶에서의 단 하루가 소설 한 편으로 녹여낼 만큼 풍부할 수 있을까?
그럴 수도 있겠다. 보통 여자라고 믿는 그 누구에게도 울프 같은, 브라운 같은, 클라리사 같은, 그리고 휩시 같은 하루가 있을 것만 같다. 우리가 상상해 왔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그런 시간들. 단순하고 일상적인 나의 하루가 또 지나간다. 단순하게도 때때로 나는 아주 행복하고 여전히 일상처럼 내가 상상해왔던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안겨주는 그런 시간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