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솔러지
배에서 내리는 순간 현실로 돌아와 얼마 못 가 끝날 거라고 모두가 예상했던 그 관계가 5년이나 계속되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웠다.
넷은 크루즈 이후에도 단톡방을 유지한 채 간간이 서로 소식을 전하고 만나기도 했지만 둘에게는 연락한 적이 없었다. 둘의 관계가 영감을 주는 대로 그들은 소설을 썼다. 현실과 일치하는 점이 발견되어도 우연의 일치이며 작가의 상상의 산물이다, 정도로 써야 했다.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아직도 만날까요?
설마요.
그럴지도요.
넷은 아주 멀리서 들려온 소문으로, 지나가다 본 근황 같은 걸로 둘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그때는 이미 실제 두 사람보다 자신들의 소설 속 두 사람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소설에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이 모임을 크루즈 앤솔러지 모임이라고 불렀다. 앤솔러지를 출간한 적 없는 앤솔러지 모임. 하지만 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도 몇 년이 지났다. 이제는 현정에게 앤솔러지에 수록될 소설은 쓰고 있냐고 물을 때만 아주 희미하게 존재하는 실제 인물들이었다. 둘이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나르시시스트였다면 넷은 소설밖에 모르는 나르시시스트였다.
우성은 한 작가가 추천한 소설들을 읽기 시작했다. 무리에서 가장 매력 없고 실력 없는 남녀가 연애를 시작하고 자신들이 가장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지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 심리스릴러, 모두가 아는 연애를 하면서 아무도 모른다고 착각하고 점점 허술해지는 걸 주변에서 모른 척하기 위해 애쓰는 아이러니를 다룬 블랙코미디,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들 때문에 스스로 몰락하는 안타까운 멜로드라마. 그 소설들은 어떤 의미로는 치열한 연애소설이었다. 그 연애는 시작부터 오해와 기만과 우월감과 열등감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결말은 구원이거나 파국밖에 없었지만 소설은 어떤 결론도 명확하게 보여 주지 않는다.
빠져들고 밀고 당기고 사랑하고 집착하던 당사자들은 몰랐던 이야기들은 우성의 수사에 영감을 주었고 실마리를 제공했다. 우성은 한 작가를 다시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한 작가가 이 모든 이야기의 종합편이자 결말을 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결말에 영감을 줄지 모를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