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끝
넷이서 두 사람 관계의 끝을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이혼하지 않고 길게 같이 간다. 남편에게 들켜서 이혼한다. 남편에게 들키지만 여 작가가 변명하고 남 작가를 스토커로 몬다.
그러면 남 작가가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너무 심한 상상을 했네요.
소설이니까요. 목숨을 걸어야지.
남의 목숨이라고 막 얘기한다.
연애소설인데 불륜이다, 그러면 비극을 포함할 수밖에 없지 않아요. 어쨌든, 누군가는 나락 가는 건데.
배우자는 이 사실을 알고 싶을까요, 모르고 싶을까요.
어렵네요.
그들이 그때 이야기한 건 등장인물이었을까, 실제 인물이었을까. 픽션에서 죽음은 결정적이다. 범죄소설을 써 본 현정으로서는 더더욱. 죽여야 할 인물을 죽이지 못한 것이 패착이 되는 경우가 있다. 살아야 할 인물이 죽는 것이 오히려 낫다. 독자들은 분노하고 슬퍼하고 결국 몰입하게 되니까. 어떤 소설 속에서 삶과 죽음은 현실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누군가 죽는 건 너무 손쉬운 선택 아닐까요?
미칠 수는 있을 거 같아요. 지금도 정신적으로 약한 사람이긴 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뭔가 해야 할까요?
뭘요?
증인이라도...
그냥 소설로 써요.
소설은 행복을 상상할 수도 불행을 상상할 수도 있지만 어떤 소설은 불행에서 비롯된다. 안나 카레니나는 기차에 몸을 던졌고 아내가 저택에 지른 불에 로체스터는 눈이 멀었지만 제인 에어는 그 곁에 남았으며 히스클리프는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죽는다. 그리고 거기에는 그렇게 간단히 요약해 버릴 수 없는 이야기, 그렇게 말해 버리고 끝내면 안 되는 이야기들이 있다.
실제 인물을 두고 한 상상은 거기까지였다. 넷은 한계 없이 상상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오히려 현실의 선을 언젠가는 반드시 생각하게 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그리고 어떤 소설적 허용…
현정은 크루즈의 막바지에 나눈 대화를 기억한다. 소설이라면,이라는 가정하에서 윤리 없던 사랑은 현실에 안착하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아이가 알게 되면, 남편이 알게 되면, 그런 말들이 오가자 누군가는 분명히 상처받을 거라는 현실에 그들은 마음이 착 가라앉았다.
불륜이 나쁜 건 결혼으로 인해 생긴 책임과 의무만 배우자에게 떠넘기고 연애의 기쁨은 자기들끼리 누리기 때문이잖아요. 그런 걸 하면서 사랑이라고 자랑스러워하면 안되죠.
참 이기적인 사람들 같아요. 그 사건만 봐도 일차적으로는 자기들이 잘못해 놓고 2차 가해를 하고 시스템을 탓하기까지 하다니요. 불륜도 시스템의 문제겠네요, 그럼.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평생을 사는 건 인간의 본성을 거스른다, 그런 거요?
남 작가는 그런 논리를 펼칠 사람 같아요. 충분히.
거짓말은 나쁘다는 걸 우리가 다 아는데 그 거짓말을 무수히 하게 되는 게 불륜이잖아요.
우리도 늘 소설로 거짓말을 하잖아요.
잘 생각해 봐요. 우리가 하는 게 진짜 그런 거짓말인지…
그들이 진짜 사랑이라도 해서 남편에게 고백하고 이혼한다는 결말이면 인정할게요. 그런데 여 작가가 그럴까요? 남 작가가 베스트셀러 작가도 아니고… 지금도 자기 배경 자랑을 그렇게 하잖아요.
우리가 너무 여 작가를 인정 안 해 줬나 보네요.
소설을 못 쓰니 그런 걸로 자기 자존감을 채우려는 걸까요.
그냥 속물 같아요. 근본적으로 나르시시스트이기도 하고요. 나르시시스트들이 불륜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잖아요. 배우자가 받을 상처를 알지만 자기가 느낄 쾌락이 더 중요하대요.
두 사람 걱정은 여기까지만 해도 되지 않을까요. 배에서 내리면 현실로 돌아가겠죠. 아무도 모르는 일인 줄 알고 자기들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리고 소설을 쓰겠죠.
우리도 소설 써요. 이걸로 각자.
재밌겠다.
모아서 앤솔러지를 내요.
넷이 둘과 최선을 다해 거리를 둔 것은 소설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자신들의 입으로 사랑이든 불륜이든 이별이든 그 무엇이든 고백하는 순간 소설을 마음껏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소설을 위해서라면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 소설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