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도네시아, 그리고 아이의 '다름'을 가지고 한국에서 살아가기
나는 어린 시절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보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8년간 자카르타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이어서 1년간 대학 예비 과정을 다녔다. 그리고 14년간 한국에서 대학생활, 사회생활을 이어가던 참에 다시 또 인도네시아 발리다.
원래 부모님은 동남아시아를 거쳐 미주권 대학에 연결된 진학하길 원하셨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에서 예비대학을 지내던 나는 뜻밖에도 한국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몇 가지 큰 계기가 있었는데, 결론은 온전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느낌을 받았던 느낌 때문이었다.
나는 그저 '한국 사람이라면 가져야 한다'라고 여겨지는 평범한 일상을 누려보고 싶었다. 19세가 넘어가면 만들 수 있다는 민증도, 한글 석자로 본인 이름이 찍힌 통장도, 알바를 하며 돈도 벌어보고, 친구들과 한밤중까지 웃고 떠드는 대학생활을 만끽해보고 싶었다, 소소한 것이지만 이상하게 그때의 나는 그런 것들을 다 경험해보고 싶었다. 부모님을 설득해 마침내 한국행을 결정했고, 한국에서의 삶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혼자 살아가는 과정은 처음이었다. 부모님 아래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지냈던 시간들과는 완전히 다른,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뤄지는 삶이었다. 물론 빨리빨리 문화와 유교적 관습, 치열한 경쟁이 버거운 순간도 있었지만 그 모든 경험은 결국 나를 단단히 세우는 과정이었다.
혼자인 내게 한국은 이상적인 환경이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되어 다시 마주한 한국의 현실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내가 학창 시절 누렸던 평온함과 따뜻한 어린 시절을 내 아이에게 물려줄 수도, 경험하게 할 수도 없다고 느꼈다.
가족이 모두 모인 저녁식사는 물론 어렵고, 어쩌다 회식이라도 생기면 자는 아이 얼굴만 보다 하루를 마쳤다. 주말에는 밀린 집안일과 평일을 위한 반찬 준비 그리고 아이와 나머지 시간을 보내고 나니 내가 쉴틈이라고는 있지 않았다. 아이 하나를 온전히 키우기 위해 (전)남편과 나는 서로의 시간을 쪼개며 갈아 넣듯 살아야 했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당연히 내 시간은 없었고, 여유는 사치가 되었다.
더욱이 내 아이가 자폐스팩트럼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가족을 더욱 고립시켰다. 사람들의 시선, 행동, 말 한마디가 우리를 움츠러들게 했다. 아이의 작은 실수조차 부모의 잘못으로 치부되는 현실 속에서 나는 점점 예민해져 갔고, 아이는 위축되었다. 그리고 결국 가족 모두가 고립된 '집'이라는 환경 속에서만 지냈다. 외식과 외출도 어려웠고, 혹시나 문제가 될 행동을 보이면 '자폐스팩트럼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꼬리에 달며 핑계를 대는 것 같은 이 삶을 나는 적응하며 살아가기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식당에서 유튜브를 보다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순수하고 해맑은 웃음소리었고, 고작 한 번의 웃음이었다. 그때의 나는 "쉿! 크게 웃지 마."라고 말하며 아이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멈춰 섰다.
내가 스스로 내 아이의 웃음을 금기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부모가 된 나는 사회의 시선에 맞추려 내 아이의 '아이다움'을 내 마음대로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아이는 이렇다'라고 설명하며 살아온 내 삶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도 깨달았다. 내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디게 성장하고 자란다. 하지만 그 다름이 통제받아야 하거나, 사랑받지 못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이제는 주변 시선을 의식해 아이의 모든 행동을 억제하려 예전처럼 애쓰지 않기로 했다. 아이가 단순히 좋아하는 것에 웃고, 느끼고, 만끽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바란다, 이 다름과 순수함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수 있는 곳, 그리고 나 역시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