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 위 첫 걸음_
제주올레 첫 코스로 18코스를 선택한 건 순전히 위치 때문이었다.
올레 코스를 정할 때 기준으로 삼은 건 우리가 제주에 도착하는 시각에 따라 정하기로 했다.
3월 23일, 코로나가 여전했던 터라 남편은 재택근무 중이었고 그 덕분에 퇴근 시각인 오후 18:00가 되자 재빠르게 배낭을 둘러메고 공항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동해서 제주 공항에 밤 9시가 넘어 도착했다.
이렇게 도착이 늦은 경우에는 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숙소를 잡아도 밤 10시쯤이 되어야 짐을 풀고 쉴 수가 있다. 반대로 어두워지기 전 제주에 도착하는 경우에는, 멀리 이동할 시간이 있기에 공항에서 먼 거리에 있는 올레코스를 선택해서 걷는다.
올레 첫 여행 3박 4일 동안 우리 숙소는 두 곳이었다.
2박은 18코스 시작점과 가까운 곳이었고, 나머지 1박은 두 번째로 걸은 20코스와 가까운 게스트하우스였다. (이틀 연이어 20km를 걷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 19코스보다 조금 짧은 20코스를 걸었다.) 한 곳에서 2박을 하는 경우는 배낭을 메고 걷는 날을 하루 줄이는 장점은 있으나, 이틀 중 하루는 그만큼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우리는 올레 여행에서는 버스를 타고 다니기로 했다. 올레길 시작점과 종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 코스가 많고, 배차 간격도 나쁘지 않다. 더군다나 계속 걸어서 이동하는 여행이라 렌터카가 불필요한 데다, 제주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는 만큼 대중교통이 더 어울리는 여행이기도 하다.
다음 날 아침 숙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18코스 시작점을 찾아 출발했다. 18코스는 관덕정 분식에서 시작하는, 제주 원도심~조천 코스다.
관덕정 분식에서 시작점 스탬프를 찍고 마을 사이 골목길, 개천 길, 대로변 다양한 모양의 길을 지난다. 김만덕의 숨결이 남아있다는 건입동 오르막길을 꾸준히 오르다 보면 사라봉 공원 입구를 만난다. 입구에서 다시 이어지는 계단을 보면서 헉 하는 소리를 나도 모르게 내뱉게 되지만, 사라봉 정상 이후에 만나는 길에서는 어딘가 정상에 올랐을 때 늘 하게 되는 독백을 하게 된다. '맞아, 이런 풍광을 보려면 그 정도는 치러야지.'
힘겹게 올라온 사라봉 반대편 길은, 바닥에 떨어져서도 여전히 붉디붉은 동백이 남아 아름다운 산허리 둘레길이 이어진다.
그리고 만나는 4.3 유적지 곤을동. 저 너머 곤을동을 가리키는 이정표에는 '제주 4.3 당시 초토화되어 터만 남아 있는 마을'이라고 쓰여있다. 올레길 구석구석에 남은 4.3의 흔적들을 마주칠 때마다 어떻게 그 길을 지나쳐가야 할지 마음이 어렵다.
작은 마을 사잇길, 큰 바다 위 도로를 지나 별도연대, 공사 구간, 닭 머리 모양을 닮은 닭모루 해변, 삼양 해변, 그리고 또다시 작은 마을들. 올레길이 지겹지 않도록 도와주는 건 특별한 이름의 장소보다 작은 마을에서 만나는 일상의 장면들이다. 누군가는 대문을 파랑으로, 누군가는 계단을 초록으로, 그리고 담벼락을 넘어 고개를 내민 곱디고운 꽃송이들.
18코스는 다른 구간에 비해 카페 수가 적어 걷기 쉽지 않았다. 다리를 끌어 길의 막바지에 왔을 때 떡하니 나타나 준 카페, 그곳에서 먹은 조청을 찍어먹는 샌드위치는 말 그대로 꿀맛이었다. 올레를 걸을 때 어디에서 쉴지 세세하게 정하지 않고, 길 위에서 만나는 식당과 카페를 이용하는 편이지만 이런 코스일 경우에는 대략 어디쯤에서 쉬어갈지 정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제주올레와 산티아고 순례길의 차이가 있다면, 제주의 카페와 식당들은 오전 11시 전후로 영업을 시작하는 곳이 많다는 것이다. (순례길은 새벽부터 걷기 시작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아침 식사가 되는 카페들이 많다고 알고 있다.) 처음에 이 생각을 못하고 아침을 부실하게 먹고 일찍 숙소에서 나섰다가 만나는 카페들이 연이어 영업 전이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내가 쉬고 싶은 타이밍에 카페가 나타나지 않을 때가 있으므로 에너지가 되는 간식을 조금씩 챙겨 걷는 것이 좋다.
카페 의자에서 간신히 엉덩이를 때어내고 마지막 남은 1km 걸어, 조천만세동산 맞은편 제주올레안내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첫 종점 인증 스템프를 힘껏 찍어주었다. 드디어 첫 코스 완주다!
올레 여권을 주문하면 지도가 있는 팸플릿이 함께 오는데, 그 지도 한가운데 아래와 같은 문구가 쓰여 있다.
신기하게도 올레를 걸으면 걸을수록 이 문구가 점점 내 것으로 되어 온다. 올레를 걸으며 내 안의 길을 이어가 보려 한다.
425km 26코스
제주올레는 걸어서 여행하는 이들을 위한 길입니다.
끊어진 길을 잇고, 잊혀진 길을 찾고, 사라진 길을 불러내어
걷는 사람들이 걷고 싶은 만큼 걸을 수 있는 긴 길,
제주올레를 만들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이 길에서
평화와 자연을 사랑하는 행복한 여행자가 되십시오.
제주올레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는,
https://brunch.co.kr/@circle73/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