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은 올레길 위에서

by 툇마루


홈스쿨을 하던 아이가 기숙형 대안학교인 꿈틀리 인생학교에 입학하면서 우리 부부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아졌고, 우리는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했다. 워낙에 새해 계획 같은 건 세우지 않는 편이라 이것저것 많이 생각하진 않았다. 시간이 많을 때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했고, 평소에 하고 싶었던 것 중에 굵직한 두 가지를 선택했다. 그렇게 세바시 대학과 올레길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중 올레길 걷기를 위해 남편은 세밀한 준비를 했다. 워낙에 '여행 계획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오랜만에 특별한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모습이 즐거워 보였다.

첫째로, 올해 초 다른 신용카드들을 정리하고 항공 마일리지가 잘 쌓이는 카드를 만들고,

둘째로, 탐나는전(제주 지역 화폐) 혜택이 사라지기 전에 최대한으로 충전을 해두고,

셋째로, 비행기 티켓은 수시로 저렴한 티켓을 찾아 구입해 두고,

넷째로, 비행기 티켓 날짜에 맞춰 휴가를 내고, (주로 주말이나 휴일 앞 뒤 하루 정도)

다섯째로, 매월 첫 주에 T멤버십 할인이 되는 사이트에서 최대한 할인을 받아 숙소를 예약했다.


남편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저렴한 비용으로 값진 올레를 누리는 중이다. 현재까지 세 차례 배낭을 메고 다녀왔다. 처음엔 두 코스를 걸었고, 두 번째 아이도 함께 두 코스 반, 그리고 세 번째엔 다시 둘이 두 코스를 걸어 현재 총 여섯 코스 하고 반을 걸었다.


올레길을 위해 처음 배낭을 챙길 때까지만 해도 잘 걸어낼 자신이 있었다. 그동안 걷기를 꾸준히 해왔으니 하루에 20km 정도는 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조금만 무리하면 올해 안에 모든 코스를 완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막상 걸어보니 20km를 2-3일 연일 걸어낼 체력이 안된다는 것을 알았고, 배낭을 메고 걷는 것과 맨몸으로 걷는 것이 차이가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 (숙소를 이동하는 날은 배낭을 메고 걷는다.)


이렇게 세 번의 배낭을 싸고 푸는 동안 우리의 현실에 맞추어 계획은 계속 수정되었다. 우선은 올해 안에 완주할 생각은 깨끗이 접었다.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했지만, 제주 구석구석을 걷다 보니 속도를 내어 걷는 것보다 느리게 제주를 느끼는 것이 더 좋았다.

오름을 오르는 길, 논밭 사이를 걷는 길, 동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 한창 공사 중인 구간을 지나는 길, 해안으로 이어진 길.

각기 다른 소리와 다른 온도의 바람과 햇살, 다른 색깔의 흙. 우리에게 와서 닿는 자연을 느끼며 걷기로 남편과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이 생각 또한 고집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아직 올레길 위에 있으니.




오래전부터 버킷리스트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쓰여 있었다. 운동에 전혀 관심이 없을 때는 리스트 저 아래 흐리게 쓰인 일곱 글자였는데, 운동을 시작하면서 그 일곱 글자가 점점 선명해졌다. 돈을 들여도 억지로 몸을 일으켜 일주일에 한 번도 겨우 운동하던 내가, 이젠 걷지 않은 지 이삼일이 지나면 절로 몸을 일으켜 운동화 끈을 묶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 운동을 시작하면서 산티아고가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다. 하지만, 남편의 시간표 상 최소 15년 내에는 그 꿈이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아 올레길을 떠올리게 된 것이다.


미안하게도 올레길은 산티아고 순례길 연습이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었다. 언젠가 순례길을 걷게 될 때 올레길을 걸은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처음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올레길은 올레길이었다.

산티아고를 대신하는 길이 아니었다.

그 자체로 충만했다.

제주는 결혼한 이후로 매해 한두 번씩 찾을 만큼 애정 하는 여행지였지만, 걸으며 얻은 제주는 더욱 특별했다. 걸어도 걸어도 지겨워지지 않는 이 길의 모퉁이마다 마치 우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특별함마저 들었다.


걷기 위해 제주에 오면서는 예쁜 옷도, (필수로 챙기던) 헤어드라이어도 없다. 오로지 걷기에 필요한 짐만 최소한으로 챙겨 최대한 배낭을 가볍게 만든다. 배낭의 무게를 줄이는 건 일상에도 연결되는 가르침이 있었다. 사실 배낭을 메고 산티아고 길을 걷는 나를 상상하면서부터 이미 일상에 영향을 미쳐왔다. 소비욕구를 꾹 참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볍게 하는 쪽을 선택하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워졌달까. (모순되게도 올레를 걷기 위해 비행기를 탈 때마다 탄소 배출에 일조하는 한다는 사실은 마음을 늘 무겁게 한다.)


올레길을 걸으며 바람이 하나 생겼다면, 산티아고 순례자들 사이의 "부엔 카미노"처럼 올레꾼들 사이에 오가는 인사말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폭싹 속았수다"(매우 수고하셨습니다)라든가, "촘말로 좋수다"(정말로 좋습니다)와 같은 지극히 제주스러운 인사 말이다.


올레 여권. 여권은 여행에 설렘을 더해주는 힘을 가진 듯.



** 걸었던 순서대로 쓰진 못했습니다. 기억에 잘 떠올라주는 코스를 우선으로 쓰고 브런치북으로 발행하면서 쓰인 순서와 관계 없이 월별로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