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툇마루)
"오늘은 바람이 세게 불거라고 하니 현재 풍향에 맞춰서 역방향으로 걷자."
남편의 이 문장에서 포인트를 잘 잡았어야 했다. 역방향을 알려주는 예쁜 주황색 화살표를 떠올리면 안 되는 것이었다.
20코스는 김녕에서 제주해녀박물관까지 17.6km. 오늘은 숙소를 옮겨야 하는 날이라 배낭을 메고 걸었다. 배낭 없이 걸었던 어제와는 걸음의 무게가 사뭇 달랐지만, 올레꾼의 모양새를 제대로 갖춘 것 같아 살짝 들뜨기도 했다. 바람이 거칠어진 오후에는 얼마 되지도 않는 이 배낭의 무게가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역할까지 톡톡히 했다.
오전에는 등 뒤에서 밀어주는 바람 덕분에 수월하게 둘째 날의 걷기를 시작했다. 제주해녀박물관에서 종점 스탬프를 먼저 찍고 출발. (참고로 종점 스탬프는 찍는 재미가 있다. 이번엔 어떤 모양일까 하는 기대로. 거기에 비해 시작점 스탬프는 둥글거나 사각 테두리에 날짜를 적는 칸이 있는 단순한 모양이다. 중간 지점 스탬프는 간새 모양.)
돌담 사이, 밭길 사이, 유채꽃 사이. 제주스러운 길을 걷다 보면 세화 바닷가를 만난다. 아침 시간의 이곳은 평소 핫한 관광지의 세화 바닷가와 같은 곳인지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날씨도 흐린 데다 거리에 사람도 없고 문을 연 카페도 없다. 고맙게도 바닷가에 마련된 돌로 만들어진 테이블에 앉아 간식을 꺼내 먹고 삐져나온 배낭 줄도 여미고 잠시 쉬어간다.
이 날은 집집마다 마당에 걸쳐진 빨래집게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하늘이 흐렸기 때문일까. 칙칙한 배경에 알록달록 색감을 더해주는 꽃인양 예뻐 보였다.
마을을 벗어나 흙길이 다시 시작되고 손을 놓고 걸어가던 중, 다시 손을 잡게 만드는 문구가 세워져 있었다.
"좋은 동행자가 함께하면 그 어떤 길도 멀지 않은 법이다." 지금, 내 곁에 동행하는 사람에게 집중하게 하는 문구였다. 그리고 일상의 또 다른 길에 함께하는 동행자도 떠올리게 했다.
지루해지기 쉬운 올레길 곳곳에 새로운 생각을 불어넣어 주는 요소들이 있다. 이번 코스에는 박노해 님의 이 문구들이 그러했고.
월정해수욕장을 지나고 김녕으로 향하면서 바람이 점점 강해졌다. 게다가 바랑의 방향이 바뀌어 정확히 바람을 맞서며 걸어야 했다. 벽 하나를 얼굴로, 온몸으로 들이밀고 가는 듯 걸음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걸었다. (이 무렵 풍속은 10m/s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
평소 애정 하던 김녕 바다의 푸른빛을 볼 틈도 없이 바람에 비까지 더해졌고, 해안가 도로 좁은 인도를 걸을 때는 강풍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듬성듬성 놓인 큰 돌이 가드 역할을 해주고 있었지만 자칫하면 바다로 떨어질 수 있는 길이라 잠시도 남편의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바람에 날려갈 수 있다는 게 가능하겠구나 하는 두려움에 아무 생각 없이 걷기만 했다. 그러다 남편이 잠시 배낭 방수 커버를 봐주느라 손을 놓은 순간 내가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남편도 놀라고 나 스스로도 놀랐다. 손아귀가 아파질 만큼 더 세게 손을 잡고 정신없이 걸었고 마을로 들어와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부끄러움이 밀려왔고 민망해서 한참을 웃었다.
김녕 바닷가 마을에 있는 카페 <떠오르길>에서 머리에 묻은 비를 털고, 온몸에 묻은 바람을 털어내었다. 카페 주인장의 친절함은 올레꾼이 된 지 2일 차인 우리에게 제대로 쉬어가도 된다는 또 하나의 주황 리본이 되어주었다.
올레를 걸으면서 카페에 대한 개념이 바뀐다. 육지에서 언제든 내가 원할 때 흔하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마주침 자체로 고마운 곳. 제대로 쉬어가는 곳.
헝클어진 머리도 쉬고, 배낭 멘 어깨도 쉬고, 신발 속 발가락도 쉬고, 따뜻한 차로 마음도 쉬는 곳.
올레길 위에 있는 카페가 모두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이 글을 쓰는 현재 올레길 일곱 코스 반 완주- 올레길을 걷는 동안 만난 카페 주인은 대부분 우리에게 여유를 주었다.
충전이 되어 다시 배낭을 메고 근처에 위치한 시작점 간새를 찾아 스탬프를 꾹 눌러 찍고, 버스를 타기 위해 이동했다. 20코스의 단점이 있다면 김녕 올레 시작점과 버스정류장이 가깝지 않다는 것.
그날의 코스를 완주하고 스탬프를 찍고 나면,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걷는 데는 또 다른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통 그때부터 저녁 메뉴로 뭘 먹을지 의논을 시작한다. 먹고 싶은 메뉴를 떠올리는 것이 걷게 하는 힘이 될 줄이야.
걷는 여행이 가장 사치스러운 여행이라 했던가.
바쁜 현대 사회에 긴 시간을 내야 하고, 긴 거리를 걸을 수 있는 체력에, 마음의 여유까지 필요한 사치스러운 여행이 맞다. 그러나 이런 값비싼 것들을 한꺼번에 쏟아버리는 사치를 부릴 만큼 가치 있는 여행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무엇을 얻느냐는 질문을 한다면, 아직 '이거다!' 하고 대답해줄 말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몽글몽글 내 안에서 무언가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건 말할 수 있다. 그것이 26개 코스를 완주하는 날 모습을 드러내 줄지, 완주하고 글로 정리를 한 뒤 모습을 드러내 줄지, 언제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몽글거리는 무엇이 내게 또 다른 힘을 만들어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느껴가고 있다.
조심스럽게 권해본다.
"같이 걸으실래요?"
_짐 싸기 팁 하나.
최소한으로 챙기고 가벼운 배낭을 만드는 것도 좋지만, 가능하다면 계절에 상관없이 가벼운 샌들 하나는 챙기자. 온몸을 개운하게 씻고 난 후, 잠깐 숙소 근처 편의점에 가야 할 때 다시 등산화를 신는 건 맨발로 갈까 고민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_ 20코스 식당 소개.
우리가 갔던 식당은 <오누이 식당>이었는데, 푸짐하고 친절하고 맛났음. 20코스를 다시 걷는다면 이 식당을 찾아갈 만큼.
_제주올레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