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져!"
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말이다.
조심스럽고 소심한 성격으로 지낸 세월이 길었다. 게다가 내가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과 잘 지내고 싶다는 몹쓸 소망까지 가졌던 터라 스스로를 편히 두지 못했다. 직장 생활을 할 때는 같은 공간에 있는 모두의 기분을 살피는 일에 에너지를 넘치게 허비하기도 했다. 같은 부서가 아닌데도 얼핏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으니까.
다행스럽게도 서른을 넘고 마흔을 넘으면서 모두와 잘 지내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는 나를 싫어해도 괜찮다는 여유도 갖게 되면서 서서히 어깨를 펴고 섰다. 이렇게 10년이 지난다면 사람 사이에서 꽤 단단한 나로 서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십 년 전 기대와 다르게 오십이 되어도 기어이 남아있는 소심함이 대인관계에서 작동되고 있다.
기대했던 모습은, 소신껏 말할 줄 알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쿨한 선생님' 정도는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십 년 세월이 멀게 느껴졌던 터라 오십에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나이일 것이라 착각했다.) 선생님은 언감생심, 아직 갈 일이 먼데다 쿨함은 몹쓸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어깨를 펴고 서기 시작한 후로 달라진 게 있다면 용기를 내어 끊은 관계가 생겼다는 것이다. 나의 시간, 밥값부터 시작해서 나의 역사나 가치관 등을 하찮게 여기는 관계는 더 이상 유지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결과였다.
“꺼져!” 하고 외치고 싶은 순간을 어림잡아 서너 번, 아니 예닐곱 번쯤은 삼켜본 관계가 대부분이었다. “꺼져!”까지는 아니어도 조심스러운 “꺼져 줄래?”라도 말하고 싶었던 관계. 결국 이조차도 단 한 번도 내뱉지 못했지만.
두 눈 질끈, 두 주먹 불끈. 관계를 끊는 데는 떨림이 동반된 결단이 필요했다. 이성적으로는 잘했다고 생각했지만, 감정적으로는 개운치 않았다. '정말 잘한 걸까?', '분명한 이유를 말해줘야 하지 않았을까?',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런 생각들이 사이좋게 줄을 지어, 잊지도 않고 찾아온다. 끊은 관계를 다시 연결할 생각도 없으면서, 갖다 버리지도 못하고 족쇄처럼 달고 다닌다.
인간관계는 버스의 승객과 같다고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운전하는 버스에 도중에 탔다가 얼마 가지 않아 곧바로 내리는 승객, 중간에 타서 오랫동안 머무는 승객, 종점에서 종점까지 가는 승객 등 다양한 승객이 있는 것과 같다고. 끊어진 관계는 그저 내릴 정류장이 되어 내린 거라고 생각하면 쉬울 텐데, 내 버스에 탔던 승객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운전이 매끄럽지 못했던 건 아닌지, 버스 의자가 맘에 들지 않았던 건지 생각하면서.
관계를 맺는데 생기는 이런 어려움 때문일까.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데 머뭇거리게 되고, 속도가 급한 사람에게는 열려고 하던 마음도 급히 닫게 된다. 다행히 비슷한 속도로 관계를 맺어가는 경우에도 제대로 마음을 열기까지 꽤나 오래 걸린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물리적 거리를 두어야 하는 팬데믹을 지나면서, 사람 사이에서의 나를 들춰보는 시간이 길었다. 남을 아는 것만큼이나 나 자신을 아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이 시간을 통해서 나에 대해 분명하게 알게 된 한 가지가 있다. 나는 선을 넘는 사람을 몹시 싫어한다는 것을. 그간 꺼지라고 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모두 선을 넘어버린 경우였다.
누군가 글에 힘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글 속에서라도 외치고 싶었던 그 한마디를 외친다면 달고 다니던 족쇄를 끊을 수 있다고 믿고 싶다.
전업주부인 나를 앞에 두고 전업주부를 비하하는 말을 던지던 L, 꺼져!
만나는 시간이 소중해서 기꺼이 밥값을 냈더니, 차비도 내달라던 J, 꺼져!
평생 동안 아빠와 힘들었던 걸 알면서 이제 용서하라고 쉽게 말한 T, 꺼져!
옳고 그름에 핏대를 세우더니 약자를 위해 쓰이는 세금은 아깝다던 M, 꺼져!
쉰을 넘고 60줄에 서면 쿨한 선생님이 가능할까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말 통하는 나이 쫌 많은 언니'쯤은 되어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