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그 아이 알지. 근데 왜? 공부 잘하고 괜찮은 아이 같던데."
"그 집 아이 알지? 그 왜 공부도 잘하고 괜찮아 보이는 애."
"그 친구 어때? 대학도 좋고 괜찮아 보이던데."
괜찮은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
이 둘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를 현실에서도 드라마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듣는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괜찮다'의 의미를 내가 잘 못 알고 있는 것인가.
이런 기준이 자연스러워지기까지 한국은 어떤 시대를 지나온 것인가. '공부 잘하는 것'의 힘은 어디까지 뻗어있는 것인가. 시대가 변하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바람이 불어와도 공부의 위상은 떨어질 줄 모르고 치솟는다.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들의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이 사회의 다방면에서 평가 기준으로 굳건히 자리 잡아버린 요상함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달리기 잘하는 아이 있잖아. 그 괜찮은 아이 말이야."
"있잖아, 그 학교 앞에 식물 잘 돌보는 괜찮은 아이 있잖아."
이런 말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다양한 말들이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애당초 아이들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판단의 단어를 넣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
아이들이 가진 잠재력을 믿자. 그 속에 영글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을, 어떤 어른이라고 함부로 판단의 수식어를 붙일 수 있겠는가.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에게 원하는 게 뭔지, 세상이 자신에게 원하는 게 뭔지를 알아가는 것보다, 자신이 세상에 나가서 하고 싶은 게 뭔지를 알아가는 시기를 마음껏 누려야 한다.
판단 없이
내 아이를 네 아이를 믿어주자.
아니, 믿자.
(이미지: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