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었던 올레길을 뒤늦게 하나씩 떠올려 정리하면서 그 시간들이 떠올리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도통 떠오르지 않는 구간에서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게다가 쓰는 동안 다시 봄이 되어버려 아직 걷지 않은 올레길에 대한 그리움까지 더해졌다. 고맙게도 그 그리움은 제주에 가지 않아도, 산책길이라고 이름 붙여지지 않은 길이라도 계속해서 걸을 수 있는 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10여 년 전, 나만의 명품백이 하나 생겼다. 그 무렵부터 깊이 생각한 두 단어 "가볍게 느리게"를 레터링 해서 그려 넣은 가방이었다. 이효리 씨를 좋아하기 시작한 때라 제주행 비행기를 탈 때면 '혹시라도 만나면 이걸 꼭 선물해야지' 하고 두어 번을 들고 타기도 했다. 역시나 한 번도 못 마주쳤지만.
그 무렵부터 지금까지 삶의 모토인 두 단어가 올레길을 걸으면서 더 단단히 마음에 심어졌다. 가볍게 느리게.
가벼운 배낭을 꾸리다 삶이 가벼워지고,
느리게 걸으면서 사회가 정해둔 시간보다 느리게 가도 괜찮다는 확신을 가졌다.
'한 번에 길게 걷는 시간'이 준 배움이 크고 작게 삶에 스며든 것을, 올레를 걷기 시작한 지 1년이 지난 지금에야 보게 된다.
일찍 걷기 시작해서 더워지기 전에 완주하자 했고, 7시 반부터 걷기 시작해서 12시 반에 완료했다. 다른 코스보다 짧기도 했고, 카페도 넉넉한 코스라서 더위에 지치지 않게 자주, 충분히 쉬어가면서 걸었더니 오히려 더 빨리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더울 때 올레 걷기는 할 만하지 않은 걸로. 더더욱이 그늘 없는 바당올레는.
이번 올레 여행의 15코스, 16코스 모두 핫하디 핫한 애월 쪽에 있는 코스라서 우리 취향에는 좀 맞지 않는 구간이 많았다. 과하게 개발된 곳 옆에 개발 중인 곳 옆에 쓰레기들. 해서 여기가 제주인가 싶은 순간이 자주 있었다. 덕분에 자주 카페에서 더위를 피해 갈 수 있는 혜택을 누리는 모순이 있기도 했지만.
고내 포구에서 15-b코스를 역방향으로 걷다 보면 애월 해안 산책로를 만난다. 바로 이어지는 줄 알았던 한담 해안 산책로는 해안길과 마을 안 길을 번갈아 걸여야 만나게 되는데, 두 길의 분위기는 많이 달랐다. 개인적으로는 핫한 만큼 잘 닦인 한담 보다 조금은 투박한 애월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아침 일찍 나선 덕에 늘 여행객이 붐비는 한담 해안 산책로 또한 여유롭게 누리며 걸을 수 있었다.
바닷물이 닿을 듯한 해안 산책로, 모래사장이 고운 곽지해수욕장, 복덕개 포구 등. 이렇게 다양한 해안길을 만나는 것은 즐겁지만, 이어지는 아스팔트 해안길은 더운 날씨에 간간이 이어지던 대화마저 뚝 끊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아무리 더위가 괴롭혀도 놓칠 수 없는 올레길에 뿌려진 보물들.
_동일한 간격으로 지붕 위에 올려진 돌조차도 제주의 현무암,
_저 멀리서부터 다시 저 멀리까지 서로의 속도에 어긋남 없이 달리시는 두 분,
_전기를 끌어오는 전선의 모양조차도 사랑,
_뙤약볕에 놓인 장독들도 하늘과 어우러지는 모양.
살기 위해 선택한 방식들이 그저 지나치는 여행객의 눈에는 아름답게만 담기는 것이 괜찮을까 싶었지만 놓칠 수 없어 담아보았다.
일찍 시작해서 일찍 걷기를 끝낸 덕분에 한참을 숙소에서 쉬다가, 슬리퍼 끌고 터덜터덜 동네를 걸었다. 의도치 않게 현지인인양 간식거리를 사 오는 것도 또 다른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우리가 제주에 살면 이런 모양이겠지 하며.
이 날 최고 온도 34℃ 속에 걸으면서 가을이 될 때까지 당분간 휴올( : '올레를 쉬다'라는 의미로 내 맘대로 만든 단어)을 선언했다. 남편은 더위도 추위도 잘 견디는 편이라 아쉬워했지만, 워낙 단호하게 의견을 내었더니 받아들였다. 아무리 걷는 것을 좋아해도 건강을 위해 때를 가려가며 즐기는 것으로.
여름 올레 tip 하나,
마스크 팩을 미리 준비하면 좋다. 올레 도중에 있는 편의점에서 마스크팩을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얼굴을 잘 가리고, 바르고 걸어도 숙소에 도착하면 여지없이 얼굴은 후끈거린다. 샤워 후 미리 냉장고에 넣어둔 마스크팩을 붙이면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