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나흘 일상
엄마는 늘 아쉽다.
무뚝뚝하지만 말없이 엄마 곁을 지키는 아들이 셋이나 가까이 있어도 엄마는 늘 아쉬워하신다. 두 딸이 모두 멀리 산다는 게 엄마에겐 어쩔 수 없는 서운함이다. 딸과 팔짱 끼고 오늘은 여기, 지난 주말엔 저기 다녀왔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전하는 전화기 속 엄마의 목소리는 받고 싶은 선물을 말하지 못하는 아이 같다. 나 또한 엄마와 팔짱 낀 일상이 부러워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짧지 않은 시간을 내자 마음먹었다.
기차역까지 마중 나와 있는 엄마는 지난 명절보다 조금 더 작아진 듯 보였다. 다분히 주관적인 측정이겠지만 언젠가부터 몇 개월을 사이에 두고 만날 때마다 매번 엄마가 줄어드는 것 같았다.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보여주는 것처럼. 3박 4일 짐이 담긴 가방을 들어주겠다며 뻗는 엄마의 팔을 당겨 내 팔에 걸어 드디어 팔짱을 만들었다. 기차역 근처 카페로 갈 때도 카페를 나와 집으로 갈 때도 엄마는 얇아진 팔을 내 팔에 즐겁게 올리셨다.
다음날부터 엄마의 이른 기상 시간을 고려해 나도 일찍 일어나 일찍 집을 나섰다. 3박 4일 동안 여든 다섯 엄마와 쉰셋 딸은 인스타 속 카페도 찾아가고, 엄마 마음에 쏙 드는 흰색 셔츠도 사고, 엄마는 참 오랜만에 일곱 시간 넘는 통잠도 주무시고, 같이 맛있는 밥도 해 먹고, 새로 돋은 엄마 흰머리 염색도 해드리고, 작은 저수지를 찾아 풀 구경에 산책도 하고, 시장 구경하다 들른 콩국수 집이 너무 맛있어서 보니 줄 서서 기다리는 맛집이기도 했고, 마트에서 필요한 물품 쇼핑도 하고... 아침부터 서두른 덕분에 풍족한 하루하루였다. 많은 것을 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엄마가 가장 좋아하셨던 건, 수다 타임이었다. 어설프게 검색하고 찾아간 탓에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이동해도, 도착한 목적지가 사진보다 실망스러워도 그저 편안하게 앉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좋아하셨다. 싱거운 레몬티도 이야기가 추가되어 달콤해지고, 내 보기엔 허허벌판인 카페 주변도 이야기가 추가되어 산책하기 좋은 곳이 되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배고픈 줄도 모르고 세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나중엔 내가 운전을 하지 않으니 이야기하기가 좋다며 오히려 버스 이동시간을 좋아하셨다.
그렇게 허니문 같은 시간으로 채우고 집으로 가는 기차에 탙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3일째 오후부터는 엄마도 나도 굳이 팔을 걸지 않았다. 사랑하고 아까운 엄마여도 맞지 않는 부분이 까슬거리기 시작했고, 마주 보며 웃는 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불편하게 까슬거리는 것을 엄마 앞에 결국 꺼내놓고 말았다.
지치지도 않고 여기저기 다니며 조잘조잘 이야기로 웃는 시간은 딱 그만큼이었던 것 같다. 서로 무리한 탓이었을 수도 있지만 꼭 그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나대로 참은 시간이 많았다고 생각하지만, 엄마는 엄마라서 참은 시간이 더 많았을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가족 없이 혼자 내려온 막내딸을 챙겨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과 또 그만큼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 사이에서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받기보다 이제는 챙겨드리고 싶은 내 마음이 잘 전달되지 못하는 것 같아 지치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표현하지 않으셨지만 엄마도 따박따박 잔소리를 하는 딸에 지치셨을지도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는 속상한 마음이 자꾸 올라왔다. 늘 같은 부분에서 엄마와 덜거덕거리는 사실이 속상했다. 현실적으로 앞으로 엄마와의 시간은 2박 3일로 해야겠다며 내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것도 속상했다. 3년 만에 엄마와 단둘이 시간을 가지면서 단 4일도 못 버티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부정적인 말이 늘어난 엄마의 현실은 무엇으로 채워져 가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아서.
추억은 미화된다는 것은 의지가 부여되어 그런 것인지 절로 그리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쉽지만은 않았지만 지난 나흘도 미화되어 남았으면 좋겠다. 뽀얗게 필터를 씌워 화사하게, 바라기는 내게 보다 엄마에게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