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초여름 묘비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내가 말했던 것은 "무해하고자 했던 꿈을 이루다."였다.
무해하게 살고 싶다는 무리한 소망은 인간으로 살아있는 한 불가능하기에 죽음 이후만큼은 가능하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던 묘비명이었다. 사람에게도 자연에게도 무해하고 싶은 그야말로 꿈일 수밖에 없는 꿈.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는 중에는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기가 어려웠다. 1부에서는 읽혔던 의미가 2부, 3부로 가면서 점점 어려워졌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생각이 줄줄 이어져 나왔고, 지난 여름 묘비명에 대해 이야기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채식주의자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엔 나무로까지의 꿈을 꾼 영혜의 바람과 나의 묘비명을 같은 선상에 놓는다면 과한 설정일까. 하지만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이, 영혜가 이해되기 시작했다.
채식주의자 그 이상의 삶을 선택한 영혜는 더 이상 인간계에 속하지도, 채식하는 동물계에도 속하지 못하는 중간자로 보였다. 중간자 영혜가 받았을 고통은 작가가 묘사하는 글자 하나하나에 살아서 뾰족하게 영혜를 찌르는 것만 같았다. 울타리가 되어주었어야 할 가족 안에서조차 폭력을 당했던 채식주의자 여성이 받았던 고통, 채식주의자가 되기 전 육식을 했던 자신이 동물에게 주었던 고통을 떠올리는 고통. 그 가운데에서 영혜가 느꼈을 고통이 흐릿하게나마 느껴졌다.
<작별하지 않는다>를 곱씹으면서도, <채식주의자>를 곱씹으면서도 동일하게 와닿는 한강 작가의 마음은, 자연에 녹아들고 싶어 한다는 것. 설령 작가가 쓰고자 했던 것은 그것이 아니었을지라도 이런 감상으로 작가와 이어져보고 싶다.
노벨상을 수상하지 않았다면 <소년이 온다>부터 시작된 한강 작가의 책에 손을 뻗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뻗지 않았을 것이다. 부끄럽게도 그동안은 이런저런 후기를 들으며 용기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노벨상의 위상이 내게 크게 작용했고, 그 상을 수상한 외국 작가의 책은 못 읽을지언정 국내 작가의 책이라면 읽어야 하지 않나 하는 마음도 작용했다. 한 권 한 권 느리게 그의 책을 읽어가고 있다.
참 다행이다. 이런 긴 생각을 주는 작품을 읽지 못하고 묘비명을 쓸 뻔했다. 아마 그의 책들을 읽은 사실에 상관없이 같은 묘비명일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묘조차도 남기지는 않겠지만) 그 묘비 아래 누울 내 영혼의 무게는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