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회사는 한 종합식품기업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치즈 원자재를 수입하고 부자재를 구매하는 일을 했다. 입사했던 그해는 세계적으로 조류독감이 연이어 유행했다. 닭과 오리 관련 식품 소비가 위축되면서 가금류 산업이 타격을 입었다. 대체 식품 소비가 크게 증가했는데 피자도 그중 하나였다. 회사에서는 한 대기업 피자 프랜차이즈에 치즈를 공급하고 있었는데 소비량도 늘었을 뿐만 아니라 사용량이 적은 치즈 종류를 사용하던 피자가 그야말로 대박이 나는 바람에 재고 물량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물량을 예측해 수입해 오는 원래의 직무에서 공급처에서, 다른 시장에서 어떻게든 물량을 끌어와야 하는 상황으로 나의 직무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애쓴다고 단번에 해결되는 일은 아니었고, 나는 개인적으로 재앙에 가까운 한 해를 보내게 된다. 한 번은 선적 예정 물량이었던 60톤의 치즈가 선박에 실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화장실 빈칸에 문 닫고 들어가 서서 한참을 울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물 연대의 파업이 발생했다. 물류 화물 트럭이 운송을 중지하면서 수입한 원자재를 공장으로 보낼 수 없는 상황까지 되어버린 것이었다. 화물 업계는 운송료 인상을 요구하며 강경하게 버텼다. 그에 대응하는 공문서를 직접 만든 다음 컨펌을 받고 보냈는데, 그게 유효했는지 우리 회사는 운송료 인상 없이 운송을 재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회사의 다른 계열사들은 모두 인상 조치를 취하고서야 운송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때 임원진으로부터 듣게 된 말이 있었는데, 넌 논리가 좋다는 말이었다. 그 신입사원 때 그 혹독한 과정 속에서 그나마 알게 된 게 있다면, 공적인 글에도 예각을 세우면 상대방을 설득할 수도 때로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후 회사와 직무를 옮겨가면서도 글은 간혹 장착된 칼처럼 쓰이기도 했다.
기업 혹은 조직 내에서 보고서를 쓰거나 기안을 올릴 때 쓰는 글은 일종의 형식 안에 있다. 그것들은 일의 경과를 나타내고 상호 합의한 형식 틀 안에 있다. 하지만 형식 바깥의 글은 논리가 필요하다. 상대방을 설득해야 할 때, 거래처, 파트너사와의 거래 관계에 있어, 상품에 대한 설명이나 필요를 설득하거나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브랜드를 적확하게 설명해야 하거나 카피를 만드는 경우조차 그렇다. 그런 경우에는 글이 장식적으로 뻗어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욕망은 길을 제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논리와 응축은 하나의 길을 가리킨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그 길을 좇게 만든다.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논리가 벼려지고 응축된 글은 하나의 칼날이 되기도 한다. 그런 글은 수사나 장식 없이도 그 자체로 빛나고 날카롭다. 그러나 조직에 속해 쓰는 글은 결코 나 자신을 위한 글이 될 수는 없다. 업무의 영역 속에 녹아든 글은 내게 속해 있지 않고 조직의 자산으로 기능한다. 발화가 아무리 빛나고 날카로워도 그것은 나 자신 밖의 것이다. 내가 쓴 글은 조직의 길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서 이어지게 마련이다.
칼처럼 날을 세운 글로 누군가를 상대할 때도 있었다. 비즈니스상의 책임 소재를 가리거나 공방을 주고받을 때, 사안에 대해 날카롭고 첨예하게 대립해야 할 때 그렇다. 이때 글 속에 논리를 짜임새 있게 이어갈 수 없다면 그 글은 그저 비약과 억지 혹은 호소나 협박이 되는 경우가 많다. 비약과 억지는 상대에게 사실이 아닌 감정으로 따지게 할 여지를 남겨놓는다. 결국 어떤 사인이 감정싸움으로 엇갈려 어떻게 할 겨를도 없이 더 큰 문제로 비화하기도 한다.
때로 어떤 날카로운 글은 상대에게 상처를 낸다. 하나의 글이 상대방의 내장을 비틀고 얼굴을 일그러지게 하며 그 안에서 오도가지 못한 채 뼈골을 흔들리게 하며 고통스럽게 심장을 쥐어짜게 한다. 상대방이 그 글을 읽으며 그 어디로도 빠져나갈 구석이 없는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걸 안다. 그 글은 상대를 벗어나 있다. 글의 대상은 상대방일 수도 그 상사일 수도, 대표 혹은 회사 전체 일수도 있다. 하나의 글이지만 글 속에 담긴 날과 힘은 대상을 제한하지 않는다. 그런 글을 쓰고 나면, 가슴이 미어지곤 했다. 가끔 글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차라리 글로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면, 차라리 글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자, 생각했던 게 소설로 더 가까이 다가서게 했던 것도 같다. 때로 글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전부이기도 하다. 글은 어디에나 있다. 소설은 어디에 있는가.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흐르고 떠돈다. 이야기는 책과 텍스트 속에 있지 않고 사람들의 말과 말 사이에 있다. 이야기는 떠돌고, 텍스트는 남겨지는 것뿐이다. 문학은 떠도는 이야기처럼 존재하지만 지금 여기에 있다. 지금 현실의 이야기, 세계의 이야기에 대해,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영역이 문학인 것 같다. 소설가의 눈은 그렇듯 벼려낸 면도날처럼 세상을 정제해 날카롭게 표현해야 하지만, 그것이 무뎌질 때 허공에 뜬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 오늘도 나는 글을 쓸 내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고 했던 그 날카로움이 담겨 있는지 아니면 소설가라는 의무감으로 힘없는 문장을 써가곤 있지 않는지, 고민하곤 한다.
누군가를 의도치 않게 해할 수밖에 없는 글이 나의 성과로 판명된다면 그건 옳은 일인가. 글이 누군가를 흔들었어도, 결과적으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그건 괜찮을까. 그게 두려운 날이 있었다. 나의 글이 무뎌질 때 생각하곤 한다. 누군가를 해하기 싫어 거둔,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했던 그 글이 소설가의 운명에 갇혀 무디고 물렁해지는 건 아닌지. 아무도 감흥을 얻을 수 없는 의무와 형식에 갇힌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그런 글을 쓰며 소설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건 어떤 기만이 아닌지. 어떻게 글을 쓰며 살아가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하고 그 속에서 나는 가끔 의미를 찾지 못하고 헤매기도 하고 좌절하면서도 글을 쓰는 삶을 껴안고 살아간다.
내가 당신을 위해 쓰는 글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을만큼 벼린 칼끝을 다름 아닌 내 목과 심장을 겨눈 것이다. 글이 흐려질 때마다 무딘 심장과 목에 칼날을 겨누고 글을 써간다. 그렇게 해서 내가 바라는 건 무엇인가. 소설을 통해 이 세상을 조망하는 일. 이야기라는 허구를 통해 진실과 허구의 경계를 오가며 진실 같은 허구를 통해 이 세상의 진실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일, 그것뿐이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날을 갈며 세상을 담아낼 글을 써가는 것. 나의 글쓰기는 그렇게 세상에 기여해야 한다고 믿는다.
소설이 몇 백 년을 끊임없이 응시하여 온 것은 무엇인가. 작가로서의 나는 그 몇 백 년간 동안 존재하였던 그중 하나의 소설가가 되고 싶어 할 뿐인가. 소설은 작가가 이 세계의 무엇을 응시하느냐로 귀결된다. 단순한 사건이 이야기로 발화하는 과정 속에 바로 그런 작가의 응시가 매설되어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지금 횡단보도에 있다. 빨간 불이다. 사람들은 되도록 신호를 지킨다. 그러나 당신은 어떤 연유에서 급한 마음에 빨간 불에 횡단보도를 지나치려다 차에 치이는 사고를 당한다. 당신을 친 사람은 당신과 불화한 적이 있던 사람이다. 그 사고는 당신의 실수로 맞이한 불행인가, 어떤 연유로 당신은 서둘러야 했는가, 또한 그 사건은 당신에 대한 타인의 누군가의 복수인가.
소설은 무엇인가의 의미를 이야기 안에 내포한다. 그것은 소설가의 세계에 대한 응시, 목소리, 질문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없다면 소설은 의미를 담지 못한다. 소설은 우리의 현실에 드러난 것 아래로 개미굴처럼 무수히 연결되어 있는 묻힌 존재와 연결고리를 파헤치고 해체해 근원의 의미를, 사건에 이를 수밖에 없던 것을 새롭고 낯설게 드러나게 한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우연에 담긴 필연, 혹은 연결성을 심장이 팔딱팔딱 살아있는 채로 포획해 당신에게 들이밀며 묻는다. 이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냐고. 당신이라면? 당신 역시 이 끔찍한 현실의 무덤 속에 연결된 하나의 망이 아니었냐고 묻는 것이다. 이 세계의 짙은 우연들에 대해서, 아니 혹은 필연이었을 현상과 사건에 대해 당신에게 의도적으로 묻는다.
한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면 그 안에는 필시 이유가 존재한다. 한 인간의 삶이 무너지는 것에도 이유는 있다. 수많은 정보망 속에서 접하는 세계와 인간의 고통은 우리의 시야에 잠시 반짝이며 맺힐 뿐 그저 몇 초만에 지나쳐 가고 만다. 소설가는 묻는다. 이 세계의 무엇이 당신을 잡아당기고 있는지, 혹은 당신이 모르는 사이 무엇인가를 무너뜨리고 있지는 않는가에 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