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농부

by 조민성

어느 귀농인 마을, 한 농부가 잠에서 깨어난다.


해는 중천에 떠 있는데 어제 동네 사람들과 마신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아 머리가 아프다.



물을 마시러 부엌에 가면서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전화를 해보니 아내는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에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고 한다.


어제 정원을 꾸미려고 시장에서 사 온 수선화 구근들을 풀어보니 양이 제법 많다.

새로 만든 꽃밭 자리에 쏟아놓고 보니 생각보다 더 많다.



그는 다시 전화기를 들어 조카에게 수선화를 어느 간격으로 심어야 할지 물어본다.


"고모부네는 5cm 정도면 충분해요."


좋아. 아침 먹고 와서 심어야지.




"아 맞다. 은행 가야 되는데."


아침을 먹다 불현듯 은행에 가야 할 일이 생각났다.


마을버스는 한 시간 뒤에 집에서 삼십 분쯤 떨어진 정류장에 도착한다.


급히 준비하고 길을 나선 그는 하필 오늘 차를 가지고 나간 아내가 원망스러웠지만 저수지를 지나가며 보는 풍경에 마음이 다시 편안해진다.


"오늘 같은 날은 낚시가 좋지."


근방에서는 낚시터로 유명한 그 저수지는 나름 이 작은 동네의 자랑이다.

자신이 이곳에 이사 오기로 마음먹은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아 너무 멀다."


은행이고 나발이고 집에 가서 낚싯대나 챙겨 그냥 하루 종일 낚시나 하고 싶다.


그리고 그는 정말로 집에 돌아가버렸다.




"아 맞다. 수선화."


마당에 다시 들어서니 아침에 엎질러놓은 수선화 구근들이 미래의 꽃밭 위를 뒹굴고 있다.



창고에서 낚싯대를 꺼내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텐데 날씨가 맑아 저대로 두면 구근들은 금세 말라비틀어진다.


- 우선 흙으로 덮자.


삽을 가지고 온 그는 급하게 수선화를 흙으로 덮기 시작한다.


"와 근데 언제 다 심냐."


막상 삽을 들고 꽃밭 앞에 서니 해야 할 일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전원생활의 꿈이었던 정원을 하루빨리 만들고 싶지만 녹록지 않다.


- 천천히 하자 천천히.


최대한 부드러운 흙들을 골라 덮어준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너무 피곤한데."


흙을 다 덮고 나니 그제야 술이 좀 깨는지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온다.

슬슬 점심시간인데 점심을 먹고 나면 해가 너무 뜨거울 것 같다.


그는 다시 조카에게 전화를 건다.


"괜찮아요. 어차피 겨울 오기 전에만 제대로 심어주시면 돼요."


- 그래, 이왕 조카가 새로운 꽃들도 보내주기로 했으니 기다렸다가 한 번에 심자.


마음을 내려놓고 나니 너무 졸리다.



그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잠들었다.




"은행을 안 갔다고?!!"


집에 돌아온 아내는 벼락같은 호통을 친다.



해가 기울 때쯤 아내가 들어오는 소리에 잠에서 깬 그는 아직도 머리가 멍하다.


"당신이 차를 가져갔잖아."


"버스라도 탔어야지!"


"너무 멀잖아."


"마당은 왜 들쑤셔놨어!"


"수선화 묻어놨지."


"그걸 왜 묻어놔!"


"민성이가 묻어놓으면 된대."


"민성이가?!"


"아 몰라."



왜 이리 일찍 들어와서 피곤하게 하는지 기분이 상한 그는 담배도 태울 겸 건너집 김씨네로 놀러 간다.




"보내줬던 백합은 여기 심어놨다."


설날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조카와 질부에게 정원을 보여주며 그는 근엄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작약은 덩치가 커져서 이쪽으로 옮겼지."



물끄러미 정원을 둘러보던 조카는 곧 이런저런 조언들을 해줬고 그는 나중에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해본다.


꽃 농장을 하는 조카 덕분에 정원은 점점 풍성해지지만 꽃들이 많아지니 꽃을 집어가는 동네 할머니들이 생긴다.



봄이 오면 밭에도 작물들을 심느라 바쁠 텐데 그전에 울타리부터 쳐야 한다.


모레는 공무원 연금이 들어오는 날이니 시장에 가서 쓸만한 울타리를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한다.




"내가 못살아!!"


군청에서 지원해준 신품종 작물들을 아내가 혼자 심다가 역정을 낸다.


"그러게 그걸 왜 미리 안 하다가 지금 하냐고!!"


아직 절반밖에 세우지 못한 울타리 앞에는 사위가 보내준 방부목이 가득 쌓여있다.

내 손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세우는 기쁨을 아내는 모르지만 갈수록 요령도 붙고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다.



"조금만 기다려봐. 금방 끝나."


"이거 빨리 안 심으면 다 버려야 된다고!"


알고 있지만 울타리를 빨리 치지 않으면 꽃들이 전부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묵묵히 그는 톱질을 이어나간다.




"울타리가 새로 생겼네요?"


추석을 맞아 내려간 고모부 댁에는 못 보던 울타리가 페인트까지 싹 칠해진 채로 서있다.



울타리를 타고 자라는 장미덩굴이 새삼 멋들어진다.


"이건 내가 일일이 잘라서 만든 거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넉살 좋게 말씀하시는 고모부의 뒤편으로 고모가 폭발할 듯한 표정을 짓고 계신다.


모든 상황이 한 번에 이해된다.


"저번에 보내드린 수선화 말인데요-"


서둘러 말을 돌리며 고모부를 모시고 자리를 벗어난다.




내가 집안에서 농부로서 존경하는 분이 딱 두 분 계신다.


한분은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는 일생동안 양립할 수 없었던 독보적인 스타일의 고모부.



고모부는 내가 알고 있는 귀농인 중에 가장 성공한 귀농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공무원으로 정년까지 버티신 끈기, 적당히 먹고 적당히 가자는 여유로움, 신기한 건 시간이 걸리더라고 끝까지 직접 해보는 호기심과 책임감, 그리고 그 모든 걸 뒤에서 받쳐주는 공무원 연금까지.


특유의 인자하신 성격 때문인지 자식들도 꼬박꼬박 내려와 쉬다 가고 손주들에게 보여주려고 새장을 만들어 동네 비둘기나 까치들을 잡아넣어 키우는 엉뚱함도 보여주신다.


손주들이 와서 놀다 갈 수 있게 작은 수영장을 만드시다가 결국 손주들이 초등학교 갈 때까지 완성을 못 시키는 바람에 고모가 김장할 때마다 거대한 물받이로 쓰고 있는 것도 너무 재밌다.



정작 본인은 항상 조금 지루해하시지만 농사가 업이 되는 순간부터 즐길 수 있는 틈이 좀처럼 없어지는데 바쁘게 쫓겨 살다 문득 고모부를 떠올리면 '아 어쩌면 그렇게 가는 게-'하고 여유를 되찾곤 한다.


흔히 사람들이 떠올리는 행복한 귀농귀촌과 전원생활의 롤모델 같은 분이 아닐까.


강의를 나가면 사람들에게 성공적인 귀농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는다.



어떻게 하면 성공적이고 행복한 귀농을 할 수 있냐는 질문에 늘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


"저희 고모부처럼만 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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