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아신스 향기

by 조민성

"세상을 그렇게 꽃 키우듯이 살 순 없어."


같은 회사 사람들보다도 더 친했던 외국계 회사 차장님과 형 동생 같은 느낌으로 가지는 술자리를 끝낸 후였다.


저 멀리 전철역 입구가 보였다.


"세상은 그렇게 정직하지가 않단 말이야."



그때 당시의 난 영업사원과 엔지니어를 병행하면서 한창 사람일에 대해 신물 나있었는데, 어느 하나도 내 의지대로 결정되는 게 없는 일상보다 꽃 키우는 걸 훨씬 좋아했다.


계절에 맞게 심고, 물을 주고, 성장과 날씨에 따라 물을 조절하고, 꽃 피면 사진 찍고, 구근을 수확해서 보관하고-


정해진 규칙을 따르면 정해진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나이에 비해 빨랐던 사회생활과 바쁜 일상 속에서 뭔가 정리될 시간도 가지지 못한 채 나이만 먹어가는 게 아닌가, 심지어는 그런 생각조차 할 틈도 없이 망가지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꽃을 키우는 순간만큼은 그게 현실 같았다.


개인사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였던 만큼 최근 가지게 된 취미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었는데 흥미 있게 들어주는 표정 뒤로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이상과 원칙을 고집하는 후배를 보는 선배의 마음이 다 비슷하리라.



"그렇게 살면 안 돼요?"


"피곤하잖아."


'저러다 말겠지'라는 표정으로 다음 달 약속을 잡고 그는 나와 반대편 열차를 탔다.




- 꽃의 기억


시간이 지나고 깨달은 사실인데 꽃 키우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다.


내가 그 당시에 꽃을 정직하게 키웠던 건 내가 정직하게 키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뿌리 식물들은 사실 내가 키운다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이미 알뿌리 속에 꽃이 만들어져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물만 주면 정해진 순서대로 잎과 꽃대가 물을 머금으며 올라온다.


그중에서도 수선화는 최고였다.



실제로 수선화를 키워보면 기다란 잎이 나오면서 땅콩만 한 꽃봉오리가 같이 올라오는데, 우습게도 이 땅콩만 한 꽃봉오리가 완전히 올라와 열리면 손바닥만 한 꽃이 된다.


먼저 얘기했듯 내가 그 과정에서 한 일이라고는 물 주는 것 밖에 없었는 데도 마치 내가 대단한 업적을 이룬 마냥 뿌듯했었다.



수선화의 꽃말처럼 나는 그냥 자기애가 많은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그 정직한 순서를 좋아했던 나는 구근식물들을 좋아했고, 봄이면 봄마다 거실 한가득 구근 식물을, 그중에서도 수선화 화분들을 잔뜩 가져다 놓은 채 정직의 향연을 즐겼다.




- 히아신스 향기


사람의 기억은 참 신기하다.


그렇게 신경 써서 키우고 기억하는 건 수선화인데 희한하게 수선화만 보면 어디선가 히아신스 향이 난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히아신스도 항상 거실 구석에 있었는데, 워낙 향이 좋고 강하다 보니 향수 선화나 향 튤립을 아무리 많이 가져다 놓아도 늘 히아신스 몇 포트가 내는 크고 아름다운 향에 범벅이 되곤 했다.



봄마다 숲에 핀 수선화 꽃잎에 햇빛이 투명하게 비치는 걸 보면 마치 머릿속에 입력이라도 된 것처럼 코 끝에 히아신스 향이 스치는데 무의식 중에 그걸 수선화 향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당시 자주 듣던 노래가 Joss Stone의 Pillow talk이라는 노래였는데 그 노래를 들으면 히아신스 향과 화분에 물이 쏟던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또 신기한 게 정작 진짜 히아신스 향을 맡으면 당시의 불편했던 기억들과 스트레스들이 이따금씩 밀려와 괜스레 마음이 조금 우울해진다.



히아신스는 실내에서 햇빛을 못 받으면 어느 순간 목이 툭 꺾이는데, 그 장면도 굉장히 익숙한 장면이라 히아신스 향과 함께 겹치면 당시 드라이를 제때 못 맡겨 구깃해진 정장의 콤콤한 냄새가 같이 난다.




- 기억의 편린


얼마 전 열대 식물인 칸나의 구근을 캐러 농장에 갔다가 수선화 지바 페이퍼화이트의 꽃봉오리가 올라온 걸 발견했다.



지바는 원래 싹이 일찍 올라오는 바람에 내륙지방에서 겨울을 보내지 못하는 수선화인데, 강원도의 산속은 냉기가 일찍 찾아오니 꽃이 가을에 벌써 올라온 모양이다.



잎만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대로면 애꿎은 꽃봉오리도 얼어붙겠다 싶어 눈에 보이는 몇 뿌리만 캐다가 작업실 책상 위에 담가뒀는데 그 순간부터 콧가에 계속 발 냄새가 난다.


처음엔 이 익숙한 향기가 내 발 냄새인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니 지바의 향기였다.


어쩐지 이 광경 자체가 익숙하다 했다.



새로운 기억이 생겼다.



유리 수반과 영상 20도, 수선화 뿌리를 창가에 놓으면 발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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