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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Apr 26. 2022

가위바위보로 30명을 이길 확률

시선 3화 [게임] by 선장

주간 <시선> 세 번째 주제는 '게임'입니다.



색시야. 나는 어릴 적부터 게임을 잘하는 친구들이 부러웠어. 이상하게 동시에 시작을 하고 비슷한 노력을 해도 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늘 게임을 못하는 편이었거든. 학창 시절 나는 게임 실력은 순발력과 지능의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더욱이 승자가 멋져 보였던 것 같아.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게임’이라고 해봤자 크아, 테트리스, 캔디크러쉬 같은 진입장벽 낮은 게임들이야. 당연히 스타, 리니지, 롤, 배그 같은 류의 뭇 남학생들이 열광하는 게임은 시도조차 못 해봤지. 대체 어떤 게임까지 못 하는 걸까, 생각해봤는데 꽤나 단순한 게임까지 내려가더라고. 게임의 근본 격인 가위바위보까지 못 하는 나는 지능과 순발력뿐만 아니라 운 마저 없나 봐. 


그런 내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적이 딱 한 번 있었어. 



때는 바야흐로 2012년, 풋풋하던 20대. 나는 종종 제주도로 혼자 여행을 가곤 했는데, 금전적 여유가 없으니 주로 게스트하우스에 묵었어. 호핑(hopping)이라고 하나? 요즘처럼 팬시한 숙박업소도, 에어비엔비도 없었던 그 시절에는 특색 있는 게스트하우스들이 우후죽순 생겨나 붐을 일으켰어. 덕분에 백팩러들은 각양각색의 숙소를 전전하는 재미를 만끽했지. 심지어 나는 호핑하다 제일 꽂혔던 곳에서 4개월간 스태프 일을 하기도 했잖아. 맞아, 투숙객이 깨끗이 치우고 간 방에 감동받았던 그 곳. 


하지만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행운이 일어났던 곳은 내 취향에서 한참 동떨어진 시끌벅적 파티 분위기의 게스트하우스였어. 그때의 나는 사회친화적인 20대였나 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마냥 신기하고 재밌었어. 


안면을 튼 후 어색하게 시간이 흐르고 게스트하우스에 밤이 찾아왔어. 이제 바베큐를 할 시간이 된 거지. 총 3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긴 원 테이블에 앉아 직원이 구워주는 삼겹살을 먹으며 삼삼오오 취해갔어. 


 바비큐 파티하는 게스트하우스는 여태 통틀어서 서너 군데 정도 가본 것 같은데, 이곳에서만 유독 술이 쭉쭉 들어갔던 것 같아. 일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굉장히 유쾌하셨고, 무엇보다도 자리 선정이 좋았던 덕이었어. 여기서부터 슬슬 운빨이 붙었던 걸까.


그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사실 거의 다 까먹었어. 기억에 깊이 각인될만한 하이라이트는 파티 피날레에 있었거든. 음식과 술이 거의 다 동났을 무렵 짐짓 개구진 표정의 사장님이 테이블의 가운데에 우뚝 섰어. 그리고는 뜬금없는 안내를 시작했어.


“자, 다들 맛있게 드셨나요? 저희가 고기는 다 구워드려도, 지금 쓰신 접시와 수저는 여기 오신 분들이 직접 설거지를 하셔야 돼요.”


여기까지는 다들 그러려니 끄덕끄덕. 


“그런데 여러분 모두 하시는 게 아니고요. 가위 바위 보를 해서 한 명만 꼽을 겁니다.”


다소 극단적인 설거지 방식에 정신이 들었는지, 그제야 술에 취해 반쯤 눈이 풀려 있던 투숙객들도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어. 기름때 범벅인 서른 명의 개인 접시, 그리고 그 외 반찬들을 담은 무수한 작은 종지들이 내 눈에도 들어오더라. 웃음과 야유 섞인 반응 속에서 나는 혼자 불안에 떨었어. 물론 내가 아무리 게임을 못 하더라도, 서른 명 모두에게 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긴 해. 그럼에도 항상 가위바위보만 하면 졌던 터라 자신이 너무 없는 거야. 그런데 웬걸, 사장님이 뜻밖의 말을 꺼내시더라.


“참. 정말 뿌듯하고 값진 일인만큼, 설거지는 가위바위보 패자가 아닌 승자가 할 거예요.”


반전에 반전. 이에 사람들의 반응이 한층 더 격앙됐어. 특이하고 재밌긴 하잖아, 승자가 받는 벌칙이라는 아이러니. 자리에 있던 투숙객들은 못내 수긍했지만, 모두 ‘나만 아니면 돼’ 혹은 ‘설마 이 많은 사람을 내가 다 이기겠어?’라는 생각에 여유가 가득해 보였어. 불운의 아이콘인 나 역시 매우 만족했지. 


그렇게 안도 섞인 웃음이 만개한 채로 자신 만만하게 가위 바위 보를 시작했어. 서른 명의 인원은 네 다섯 팀으로 쪼개져 토너먼트 형식으로 승부를 가렸고, 한 판이 끝날 때마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패배자들의 짜릿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어. 


근데 그날따라 참 이상해...


진작 첫판에서 졌어야 하는 내가 자꾸 위로 올라가. 가위바위보를 하기 전, 엇갈려 맞잡은 두 손의 틈을 보며 무얼 내야 할지 신중히 결정해도 쉬이 이긴 적 없던 가위 바위 보가 그날따라 유독 잘 되는 거야. 자꾸 사람들을 차례차례 이겨버리는 거야. 


그래도 끝날 때 까진 ‘에이, 설마’ 했지. 하지만 마지막 최후의 승자 3인에 내가 포함됐고... 불길한 기운이 덮쳤어. 그 설마가 나에게 닥칠지 모른다는 선뜩한 예감이 들더라고.


색시야. 이쯤이면 대충 결과 알겠지? 맞아. 최종 가위바위보 우승자는 나였어. 난생처음으로 게임에서 서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이겨버린 거야. 하필 상금이 서른 명 분의 설거지일 때 말이지. 부끄러움 따위 잊은 크나큰 탄식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어.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세상 행복한 듯 웃더라. 


믿을 수 없었지만 이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릇의 개수나 훑고 있는데, 사장님이 다시 소주병 마이크를 잡으셨어. 


“축하드립니다! 가위바위보 1등! 와~ 설거지를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으셨어요. 그런데 제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사실 저희 게스트하우스는 전통이 있거든요. 바로 우승자가 설거지를 함께 할 한 명을 지목해서, 둘이 같이 하는 겁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오, 좀 할만하겠는데? 싶었어. 그새 친해진, 파티 내내 줄곧 옆에 앉아있던 여자아이를 지목해야겠다 마음먹었지. 하지만 잠깐의 안도가 무색하게도 사장님이 굳이 덧붙였어.


“그런데 꼭! 이성을 지목해야 합니다.”


갑작스러운 사장님의 말에 일순 모두의 눈이 더욱 흥미로운 듯 빛났어. 예상치 못한 전개에 무척 당황한 건 나뿐이었지. 모두 처음 본 낯선 남자들이고, 친하지 않은 상대에게 부탁하는 걸 병적으로 꺼리는 나는 정말 곤란했어. 동공 지진 규모가 5.0을 넘어서고 있던 찰나, 사장님이 쐐기를 박았어.


“참고로, 저희 게스트하우스에서 설거지하다 눈 맞아서 결혼한 커플 두 쌍 있습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나는 점점 더 멘붕. 사장님 덕에 이제 정말 그 누구도 지목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거지. 첫 만남에 함께 설거지하자고 공개 고백하라니, 이 얼마나 무례한 프러포즈인지...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 눈도 못 쳐다보겠더라. 그렇게 꽤 오랜 시간을 엉거주춤 찌질 대고 있었던 것 같아. 그 모습이 퍽 답답했는지, 그나마 말을 텄던 남자 무리 중 한 명이 자기 친구를 가리키며 함께 설거지를 하라고 소리쳤어. 유독 불콰한 얼굴의 그 친구는 당황했지만, 싫은 기색을 크게 내비치지 않았어. 고맙게도 결국 우리 둘은 함께 설거지를 했어. 내심 다행이었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애써 웃으며 설거지를 하려는데, 사장님이 말했던 “눈 맞아서 결혼한 커플”이라는 말이 자꾸 생각나서 부끄럽고 또 불편한 거야. 그래도 확실히 혼자 보단 둘이 하니까 빨리 끝나더라. 창피하고 곤란한 건 순간이니 역시 몸이 편한 게 최고라는 진리 어딜 가지 않더라고. 


그래서인지 사장님의 독특한 이벤트는 꽤나 유쾌한 추억으로 남아있어. 그 후 내 설거지 짝꿍은 ‘설거지 결혼 징크스’가 은근 마음에 남았는지 서울에 올라온 뒤에도 내게 몇 번 연락을 주긴 했지만, 일 년도 안 돼 카톡 프로필에 웨딩 사진이 올라오던데?




하여튼 그때 서른 명을 이기는 데 운을 다 써서 인지 몰라도, 그 뒤론 역시나 게임에서 이겨본 적이 없어. 게임은 어떻게 보면 우리가 사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양 느껴져서 질 때마다 분한데 말야. 심지어 어떨 땐 게임이 인생 같은걸 넘어, 이 세상이 게임 세계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해. 


그런데 색시야, 나는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게임이 내 노력 여부에 따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판인지 아직도 확신이 서질 않아. 아무리 애써 봤자 승기를 잡는데 번번이 실패하곤 해. 그렇게 좌절감이 올 때면 나는 게임 속 NPC가 된 것 만 같아. 내가 부러워하는 주변인들이 주체적인 플레이어인 반면, 나는 그저 결국 선택권 없이 짜여진 프로그램의 일부인 거지. 


그래도 스스로 플레이어라고 되뇌며 내 나름의 최선을 다 해야겠지. 그게 게임 창작자에 대한 예의 일거야. 그러다 보면 퀘스트도 하나 둘 깨 나갈 수 있겠지? 다행히 이 게임은 언제나 솔플은 아닌 것 같으니.





추천 영화: <안경,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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