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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Mar 06. 2023

'김용훈' 말고 '용용이'

시선 16화 [싫어하는 것] by 선장

주간 <시선> 열여섯 번째 주제는 '싫어하는 것'입니다.



회사 다니던 시절 취미로 들었던 상담 수업에서 과잠을 입은 앳된 학생이 조심스레 말하더라. 아르바이트 하는 곳에 자신이 몰래 별명을 붙여준 동료가 있다고. 수줍지만 처음으로 여기에 털어놓는 비밀이라고. 이름 끝 글자만 귀엽게 변형시킨 그 간지러운 별명은 당연히 직접 부르진 못 하고 당사자 역시 꿈에도 모르는 일이라고.


이를테면, 상대 이름이 ‘용훈’ 이라면 ‘용용이’ 같은 애칭으로 속으로만 부르곤 한대.
 

꽤 풋풋하지? 오죽 좋으면 그랬을까 싶은 귀여운 에피소드 같은데 말이야. 사실 학생은 그 동료가 무척이나 싫었대. 여기에 구구절절 자세한 이유를 말할 수는 없다만, 당시 초면인 나조차도 가볍게 넘어갈 정도의 마음과 사건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해.


응. 학생은 용용이가 그렇게나 싫었대. 평생 대지 않던 약봉지를 입에 털어넣을 정도로.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굳이 말하자면 ‘용용이’는 의뭉스러운 어감에서 느껴지는 대로 ‘애칭’이 아니고 ‘혐칭’이었나봐.


그럼에도 그녀가 그런 귀여운 별명을 혼자 되뇌여야만 했던 이유는 어찌할 도리 없이 그 사람을 곁에 둬야했기 때문이었어. 전복할 수 없는 상하 관계 속 무차별하게 내지르는 그의 폭언을 조촐한 그녀는 감당하기 힘들었대.


그렇게 그저 무시무시한 존재로 각인되기엔 억울했던 용훈은 ‘용용이로서 존재했고, 덕분에 그녀의 억울함을 일정 부분 덜어줬어. 그리고는 놀랍게도,  고맙게도 조금씩 증오의 감정이 사그라들었대. '김용훈' 대신 '용용이' 뭐라고, 그치?




며칠 전 밤, 색시에게 문득 “모든 게 싫다” 라는 카톡을 보냈지. 그러자 색시가 무슨 일인지 묻지 않고 자연스레 툭, 하고 던져준 이번 주 주제가 <싫어하는 것> 이었고.


고마워.


모든 게 싫다고 어리광부리면서 정작 자세히 하나하나 콕 찝어 말할 수 없었거든. 풀어 설명하지 못 하는 나의 무의식을 의식과 연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테라피였던 것 같아. 색시에게 카톡을 보낸, 지금은 기억도 흐릿한 그 날. 나는 뭐가 그렇게도 전부 싫었을까?


사실 나는 퇴사와 동시에 무언가, 그리고 누군가를 싫어하는걸 그만두자고 결심했었어. 증오의 감정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잖아. 언젠가 tv에서  구교환, 이옥섭 부부도 주변에 정말 싫은 사람이 있으면 그냥  사람을 사랑하기로 마음먹는다고 하더라고. 같은 맥락이겠지.


하여회사를 그만두면 이제야 내가 하고 싶은 일만 오롯이, 만나고 싶은 사람만 온전히 만날수 있게 될거라는 기대와 동시에 증오로부터의 해방감을 느꼈어. 마뜩찮은 감정은 더이상 내가 겪지 않아도  얼룩인줄 알았어.


하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면 전부 엄살이고 기만이었어. 대부분의 어른들이 견뎌내고 있는 갈등을 피할  있는 기회가 나한테만은 있을  알았나봐. 내가 뭐라고, 그치.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거라고 당당히 말할  있는 여유는 어디서 나온건지,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워. 그럴  있는 나이도 상황도 아니었거든. 그래도 억지로나마 온갖 싫은 것들로부터 도피하고 매일매일을 나의 취향으로 가득 채우려 했어.


그래서 결국 채워졌나? 그랬으면 차라리 조금은 더 떳떳했을텐데.


디즈니 만화처럼 마냥 환희에 차 있을 것만 같았는데 현실은 독일 영화보다 냉정했고,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나는 점점 주변 탓을 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그러기엔 일말의 객관성과 양심이 남아있었나. 어떻게든 찾아낸 마음 속 증오의 대상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더라.


색시야. 내가 요즘 무얼 제일 싫어하는지 말해보자면 스스로야. 싫어하고  싫어하고, 그러면서도  싫어하는지 이유를 나름 찾아낸 다음에 이를  정당화시키는 일련의 과정들은 조금 겹기까지해. 어떻게든 괜찮은, ‘적당히 나쁜사람으로 남으려는  이기적인 마음도   예뻐.


나는 아마 벌 받을거야. 왜냐하면 지금 너무나 많은 자원과 사랑을 낭비하고 있거든. 어찌해야 하지. 아무리 그래도 내 자신에게 귀여운 별명은 못 붙일 것 같은데.



그 외)


인위적인 모든 것들.

인위적인 노력들과 그렇게 자동으로는 될 수 없는 채 남는 것들.


구질구질하게 남는 감정들.

애정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과한 오기.

한 더미로 묶여 풀리지 않는 이해관계의 실타래들.


자기혐오. 더 싫은 건 자기연민. (= 이 글?)


무례함과 쿨함을 혼동하는,

솔직함과 예의없음을 혼동하는 넘치는 숱한 사례들.


책임을 망각한 자유.


오지 않을 전화를 기다리는 일. 드물게 나타나는 마음.


Pms, 알코올, 우울함으로 점철되어 정당성을 잃은 감성과, 혼자서만 지나치게 애틋한 감정.


스스로와의 약속을 깨는 모든 행동.



추천영화: <더 웨일, 2023>

어쩌면 유일한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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