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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Mar 19. 2023

아주 아주 요망한 카페

시선 17화 [좋아하는 것] by 선장

주간 <시선> 열일곱 번째 주제는 '좋아하는 것'입니다.



색시야, 암막 커튼에도 종류가 있는 거 알아?


나도 이번에 이사하면서 처음 알게 된 건데, 보통의 가정집에선 아주 살짝이라도 빛이 비치는 암막 커튼을 사용한대. 반면 내 방에서는 한치의 빛도 들지 않는 일명 ‘완전 암막 커튼’을 써. 그렇게 방 안에서 차마 여미지 못 한 볕 한 줌으로 어렴풋이 시간을 가늠한 채 핸드폰으로 영화를 보고 있을 때, 행복까진 아니더라도 가장 평안한 상태의 내가 돼. 뻐근하게 아파오는 손목은 요령이 생기면 괜찮고. 침침한 눈은 블루라이트 차단 필터를 켜면 대충 안심이고.


하지만 요즘 날씨가 부쩍 따뜻해지고 있잖아. 아직 일교차가 크긴 하지만. 집에 틀어박혀 ‘미세먼지 지수 좋음, 전국 대체로 맑음’이라는 각종 뉴스 헤드라인과 SNS 속 야외활동을 즐기는 친구들의 사진들을 애써 외면해도 사실 조금 조급해져.


그도 그럴게 봄이라 부를 수 있는 날씨는 정말 찰나니까. 일교차가 커 낮에는 조금 덥다가도 저녁에는 적당히 선선한 그런 날씨, 누군들 안 좋아하겠냐마는.


사실 봄은 여름과 겨울과 함께 ‘계절’이라고 구분되는 게 억울할 거야. 봄에게는 그만큼의 지분을 더 줬으면 해.




병원 예약 정도의 강제성이 있는 일정이 생기고 나서야 나는 결국  밖을 나가는  성공했어. 그렇게도 꺼려졌는데 막상 나가니, 역시나  좋데. 심지어 생각보다 훨씬 훨씬  좋아 억울하기까지 하더라.


솔직히 말하면 친구들이 날씨를 예찬하며 올린 풍경이나 하늘 사진 모두 필터 빨이라고 자위하기도 했거든. 깜깜한  속에서 시간을 미련하게 전부 흘리고는,  밖도  그리 아름 답진 않았을 거라 넘겨짚는 여우의 신포도 같은 마음이었나 .   좁지.


어쨌든 그날은 확실히 집에 바로 들어가기엔 아까운 날씨였어. 기왕 병원 핑계로 나온 김에 비타민D 벼락치기라도 해야겠다 싶더라. 그렇다고 산책처럼 직접적인 광합성은 겨우 반동을 시작한 팔다리에겐 무리였고. 통유리로 된 카페에서 여유롭게 햇빛이나 쬐면 좋겠다, 했지.


그런데 문제가 있는 게,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꽤 되었는데도 내가 아직 집 근처에 마땅히 죽치고 있을 카페를 찾지 못했던 거야. 그렇다고 아무 데나 들어가긴 영 안 내켜. 오랜만에 나온 만큼 뭐 하나 아쉬운 데가 없는 완벽한 공간에서 쉬고 싶었어. 결국 수차례 검색 끝에 적당한 카페를 한 군데 발굴하는 데 성공. 단, 안타깝게도 장소는 집 근처가 아닌 성수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만. 나는 도보 5분 거리에 카페가 서너 개 넘게 있음에도 굳이 지하철 역으로 향했어.


30분 남짓 걸려 내가 찾아간 성수 카페에는 우리 동네에서 보기 힘든 소박한 야외 테라스석이 마련되어 있었어. 2인용의 긴 테이블이 두 개가 붙어있는데, 친구와 둘이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셔도 참 좋을 것 같더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는 게 눈치 보이지 않는 딱 그 정도의 널찍함. 그부터가 우선 만족스러운 시작이었어.


그리고는 자리에 앉아 슬슬 노트북을 열고 뭐라도 하려는데, 테이블 바로 아래에 콘센트가 있데? 말이 카페 테라스지 야외나 다름없는 곳이었는데 말야. 보기 드문 일이라 발견하자마자 조금은 감격했지.


이제 음료를 시킬 차례. 당연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킬 테지만 그래도 무용한 습관처럼 메뉴판을 쭉 훑었어. 그런데 시중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메이 맥주를 팔고 있지 뭐람. 카페는 물론이고 웬만한 술집에서도 찾기 힘든 맥주 거든. 가격은 사악해도 대형 마트에서나 볼법한 맥주 라벨을 보자 이쯤이면 슬슬 흥분될 수밖에.


5분쯤 지났을까? 주문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있는데 내 왼쪽 허벅지에 무언가 스윽, 하고 스치는 게 느껴졌어. 묘기척에 고개를 돌려보니, 정체는 자그마한 고양이. 내가 의자 옆에 올려뒀던 노트북 커버 위에 쭈그려 앉아있더라. 장묘정신 가득한 표정으로 식빵을 굽고 있는 그 자태는 말해 뭐 해.


야옹이는 카페에 상주하는 고양이 ‘돼지’였는데, 스트릿 출신의 위엄이 돋보이는 험상궂은 얼굴을 하고 있어도 천사인걸 분명 모두 다 알아. 아기 같은 목소리를 차마 못 숨기고 세상 가냘프게 “냐옹” 하던걸. 그 사랑스러운 하찮음을 정말이지 안 좋아할 수가 없어.


이 카페 대체 뭘까, 색시야. 아주 요망하더라고.




집을 떠날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 좋을 줄은 정말 몰랐었는데. 선선한 날씨, 고즈넉한 골목, 적당한 백색소음, 텅 빈 테라스석, 희소성 있는 맥주, 그리고 고양이까지.


어쩌면 ‘좋다’는 말로는 부족한 듯 해. 해가 지기 시작해 하늘까지 물들었고 그때쯤 살짝 취기가 올랐거든.





그 외 좋아하는 것들:


식물성 라면, 카카오 함유 70% 미만의 밀크 초콜릿, 멍들 정도의 고강도 마사지, 약점을 솔직히 인정하는 모습, 억지스럽지 않은 반전 영화, 양 많은 아이스크림, 취존의 자세, 사람 없는 밤바다, 예상치 못한 안부전화, 계산 없는 관계, 딴딴한 체리, 투박한 은반지, 진하지 않은 립스틱, 고양이 스티커, 깨끗한 운동화, 어제 먹고 깜짝 놀란 요물 같은 생면 파스타(같이 가자), 진부함을 쏙 뺀 손 편지, 위아래 세트 잠옷 등.




영화 추천: <패터슨, 2017>

일상 속에서의 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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