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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Mar 11. 2023

좋다 못해 사랑하는

시선 17화 [좋아하는 것] by 색시

주간 <시선> 열일곱 번째 주제는 '좋아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별거 없는 존재가 가장 특별하게 느껴지는 순간들. 내가 몸이 안 좋을 때 달려나가 사다 준 약봉지에 고마워요 했더니 나는 사랑해요 답하는 이의 눈망울. 사랑이 넘쳐흘러 어쩔 줄 모르는 모양새. 찰나의 순간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그 찰나의 정중앙. 사랑의 공표. 미안함과 감사함에 대한 표현의 홍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긍정. 이상과 현실 간의 괴리가 좁혀지며 느끼는 행복한 오만함. 


자는 동안 보고 싶었다며 입 맞춰주는 아침 침대 위의 풍경. 나의 모든 ‘표현’들이 아름답다 하며 흘리는 감격의 눈물. 빈틈없는 다정함. 내 부정적 감정들마저 존중받는 시간. 경이로움. 마주 보고 놓여있던 소파를 기역 자로 붙여 내 곁에 앉는 일. 내리는 눈에 어떤 이를 떠올리며 사랑이라 명명하는 낭만.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존재를 찾아낸 기쁨. 감각 하나가 무뎌질 만큼 상대에게 집중하는 무드. 가슴속 떨림의 전이. 꿈만 같은 현실이 다름 아닌 현실이 맞는다는 자각. 피아노 치는 나를 그려주는 이의 모습. 청혼. 영원의 약속을 맹신하는 무지의 상태.


타인의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무모한 일.


일정한 악력으로 꼬옥 맞잡는 손. 재치. 매일 밤의 포옹. 쌔근쌔근 푸우 - 깊은 잠에 빠진 소리. 그 소리로부터 오는 깊이 모를 안정감. 동일한 반응 기제. 간직되어 있는 서로의 옷을 갈아입은 흔적. 내 표정을 따라 하는 깜찍한 이목구비. 널찍한 공간 안에 붙어앉은 두 명. 흥얼거리는 콧노래의 일정한 첫 음. 비워진 밥그릇. 내 배를 베고 잠든 이의 콧김과 내 복식호흡의 적절한 앙상블. 입맞춤. 맞닿은 맨발 끝의 촉감. 긴 외출 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 느껴지는 따뜻한 집 안의 익숙한 공기. 경쾌한 웃음. 누운 채로 두 팔 벌려 맞이하는 자세. 


모르는 새 채워져있는 커피 캡슐과 바디 워시. 냉장고 문에 붙은 애정의 메모들. 네 우는 얼굴의 색과 같다며 훌쩍이던 내게 건네어주던 분홍빛 꽃다발. 가장 자주 받아보는 꽃다발들. 무엇 하나 쉬이 버리지 못하는 답답하지만 귀여운 습성. 낮은 조도의 간접조명.


 ‘아무렴 어때’ ‘ 오히려 좋아’ ‘그럴 수 있어’. 포용을 위한 발버둥, 그 괴로움의 카타르시스. 관념들의 파괴와 확장. 나도 몰랐던 나의 사랑스러움을 타인이 발견하는 일. 열어놓은 창으로 들어오는 봄바람이 코 끝을 간지럽힐 때 이 행복을 함께 느끼는 이의 존재. 동반자.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 올려다보면 웃고 있는 얼굴. 살아 숨 쉬는 것. 감사하는 일. 불분명한 형태의 사랑을 탐구하는 일. 무너지고 재정립하는 일. 희생.




오뉴월의 바다. 초록색 향기와 귓가의 음악. 만원인 명동 거리, 압구정 로데오, 가로수길, 홍대 거리. 여름의 뉴욕과 재즈클럽. 한 겨울 그 자체. 일본의 자정 무렵 자그마한 이자까야. 오래 사용된 잘 만든 물건. 식빵 위에 교차된 딸기잼과 버터. 샤브샤브. 서로 다른 의견들의 향연. 해 질 녘의 남산 타워와 서울 야경. 퀴퀴한 합주실의 공기. 며칠 밤을 제대로 못 자 퀭한 눈가와 빛나는 눈동자. 


미술관, 도서관의 숨죽인 긴장감. 눈물이 맺힌 채 웃고 있는 입꼬리. 건너 듣는 호평. 쌓여 있는 책들. 무수한 생각들이 쏟아져 있는 일기장들. 기록하는 일. 우유 한 컵과 초코칩 쿠키. 교복 입은 채로 친해진 옆집 친구. 동질감. 가을날의 동경. 음악. 사람. 자연. 우주. 신. 꿈. 사랑.




추천 음반 : Brad Mehldau [Blues and Balla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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