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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Jun 25. 2023

정성의 공식

시선 23화 [정성] by 선장

주간 <시선> 스물세 번째 주제는 '정성'입니다.



정성.


어릴 적 소원을 이루겠다며 색색깔로 고이 접어 유리병에 전시해 뒀던 천 여개의 학종이.


친구가 제일가는 가치였던 고등학생 때 우정을 부러 전시하려 며칠에 걸쳐 전지에 빼곡히 쓴 생일 편지 같은 거.


시간이 흘러 서른, 늘 맨 얼굴로 다니던 친언니의 결혼식 날 사붓사붓 갖가지 화장품을 올리던 메이크업 샵 직원의 손길을 봤을 때.


또 최근 언젠가 받았던 선물. 나의 퍼스널 컬러를 알 리 없던 친구가 쿨톤과 웜톤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포기하고는, 코랄색과 핑크색 립스틱 모두를 고른 결정.


다시 학창 시절로 돌아가, 내가 팥죽 귀신에 빙의되었던 시절. 아침잠을 줄이면서 매일 나를 위해 팥죽을 끓이던 엄마의 모습. 팥죽 속 새알은 제각각 크기가 달랐지. 그래서 조금은 엉성해 보였던 게 사실이야. 그럼에도 최대한 동그랗게 만들려 조물조물했을게 분명한 엄마의 잠이 덜 깬 손가락들이 정성이 아니면 뭐겠어.


이런 정성 가득한 순간들이 너무 많아서 이런 식으로 나열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마지막으로 욕심내 기억 하나 더 덧붙이자면 ‘바느질’이라는 행위를 꼽고 싶어. 그러니까, 내가 아끼던 푸른 셔츠의 소매 단추가 떨어지자 한 땀, 한 땀 이를 바늘로 꿰매어주던 그 아이의 익숙지 않은 손놀림 같은 거.


그러고 보면 바느질과 세트로 붙는 ‘한 땀’이라는 표현이 참 예쁘지 않아? 모든 종류의 바느질에 고도의 집중력이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 퍽 어울리는 부사야. 사실 그때엔 장소가 에어컨 풀가동한 카페였던지라 그 아이는 한 방울의 땀도 흘리진 않았지만. 집중한 무표정에도 느껴지던 애정 어린 눈길과 구부정한 자세는 잊혀지지 않네. 


분명 정성이었겠지.  


색시가 골라준 이번 주제 덕분에 오락가락거리던 기분이 잠시 ‘행복’ 쪽에 가까이 멈춰있는 중이야. 마치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My Favorite Things’처럼 기억의 도표 위 구석구석에서 다양한 정성이 끊임없이 튀어나와.  





그저께는 ‘정성’이라는 단어에 대해 곰곰이 떠올리며 집 근처 산책을 했어. 이 실체 없는 단어의 의미를 굳이 ‘또 다른 실체 없는 마음’들로 쪼개어 봤지. 그러고 나서 보니 공통적으로 모두 온기 가득한 단어들이 ‘정성’이라는 큰 마음을 이루고 있더라.


정성 = 진심 + 인내 + 집중 + 헌신


뭐 대충 이런 공식을 만들어 버렸지 뭐야. 다른 이들에게 ‘정성’은 또 다른 의미일 수 있겠지만 나에겐 저 단어들이 유독 떠올랐어. 


그러나 과유불급. 전에도 색시한테 얘기했던 건데, 나는 매사에 정성을 들이면 들일 수록 무언가 엇나갈 때가 많아. 정성을 표하고 싶은데, 과한 ‘진심’이 부른 ‘헌신’으로 이내 ‘집중’력이 바닥나고 ‘인내’가 꺾여 버려. 즉 안 하느니만 못 한 정성인거지.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이러한 ‘모 아니면 도’의 마음가짐이 상대에게 부담일 뿐만 아니라 내 명을 급격히 줄이고 있는 것 같아. 그럴 때 거울을 보면 유독 푸석 푸석 입술마저 갈라져 있어.


근데 나 오래 살고 싶다. (갑자기?) 그러니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의 정성이 단연코 이상적이겠지. 역으로 타인들도 나에게도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웬만해선 모두 무병장수했으면 좋겠거든. 진심도 적당히, 인내도 적당히, 집중도 적당히, 그리고 헌신도 적당히. 하여 결국엔 정성도 적당히. 


그래도 색시에겐 적당히보단 조금 더 한 정성을 기울이고 싶네. 그러니 색시야. 언젠가 너의 애착 잠옷의 단추가 떨어지면 나한테 꼭 가져와. 내가 한 땀 한 땀 꿰매주기로 약속한다. 우리 집에 모아뒀던 여분의 단추 중 제일 귀여운 걸로.




관련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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