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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Oct 09. 2022

저, 혹시 주량이 어떻게 되세요? 전 네 병인데.

시선 13화 [소주] by 선장

주간 <시선> 열세 번째 주제는 '소주'입니다.





혈기왕성하던 시절, 노는 합이 유독 잘 맞아 금방 친해지는 사람이 있잖아.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몇 차례 '아 어젯밤엔 좀 오바' 싶은 순간들이 오면 자연스레 멀어지는 그런 친구. 그래서 이제는 우리를 중재해줄 중간다리 역할 친구가 함께하지 않는 이상 단둘이는 절대 만나지 않는 그런. 


소주가 내게는 그런 친구 같아. 


20대 때의 나는 그저 취하고 싶어 소주를 마셔댔었지. 하지만 30대가 된 나는 이제 강경 맥주파로 자리매김해, 소맥이 아닌 소주만 마시는 건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 되어버렸어. 밝고 유순한 친구인 맥주가 꼭 껴야만 해. 심지어 소주의 절친인 해산물을 먹을 때에도 나는 차라리 청하를 시키면 시켰지, 그 초록 병의 에탄올 냄새만큼은 더 이상 못 견디겠더라고. 아조시들 말처럼 아직 내게 삶이 소주보다 덜 써서 그런 걸까? 


하지만 스무 살 무렵 나와 친구들은 어른만이 건너갈 수 있던, 그 묘하고 붕 뜬 주취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티켓으로 언제나 소주를 택했어. 


취하려 했지만 최대한 늦게 취하는 게 자랑이었던지라 소주는 우리에게 어떤 종류의 오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지. 서로 주량을 묻고, 눈치 보고, 슬쩍 부풀려 말하고. 실제로도 주량을 늘리려 연습이랍시고 엄청 마셔댔던 기억이 나. 지금은 소맥으로 한 병 겨우 채우면서 그때의 나는 소주 네 병을 혼자 마셨다니까. 물론 막판에는 더이상 사람의 형태가 아닌 모습으로 길거리에 나뒹굴었지. 그래 놓고 누가 주량을 물어보면 자랑스레 소주 네 병이라고 말했어. 실은 두 병 넘어가면서부터 기억이 가물가물했는데 말이야. 


심지어 편의점에서 파는 조그마한 소주팩에 빨대를 꽂아 대낮에 도로 한복판을 걸어 다니기도 했어. 이쯤이면 안 취했어도 스스로에게 취해있었던 게 분명한데... 그 모습을 그려보면 꼴값이라는 단어 말고는 정말이지 떠오르는 말이 없다. 술부심에 짐짓 뿌듯하던 흑역사는 우리끼리 비밀로 해줘. 


그렇게 맛도 제대로 모르면서 소주를 마셨어. 그도 그럴게, 소주는 나에게 맛보다는 멋이었으니까. 갓 성인이 된 나에게 맥주는 너무 쉽고 순진해 보였고, 값나가는 양주는 고리타분한 면세품으로만 느껴졌어. 소주의 적당히 높은 도수와 무심한 서민적 이미지는 '진짜 어른'의 그것과 닮아 있었고, 그게 그 당시 나와 내 친구들에게는 퍽 'hype' 해 보였나 봐. 


이렇듯 갓 성인이 되자마자 제일 많이 마셨던 술이 소주였어. 덕분에 지금은 소주 냄새만 맡아도 주사로 패악질을 부리던, 창피했던 20대 초의 온갖 과거들이 떠올라. 그래서 더더욱 소주 그 친구를 멀리하게 되었지. 도수가 높은 위스키나 얼추 비슷한 느낌의 사케는 마시면서 소주만은 도저히 못 마시겠어. 


과연 소주에 대한 좋은 기억이 더 많은 사람이 정말 있는 걸까, 색시야? 


심지어 불행인지 다행인지, 술 마시고 내가 한 실수보다는 남이 한 실수를 목격하거나 당한 일이 더 많았어. 그렇게 술 좋아하는 이성에 대한 불신까지 소주 덕에 켜켜이 쌓아왔나봐.




왜 그렇게 취하려 했을까?


십여 년 전, 한국에서 교환학생을 할 때 ‘문화와 철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어. 그때 교수님이 술에 대해 말씀하셨던 게 생각이 나네. 술을 마실수록 느껴지는 그 몽롱한 상태가 닿을 듯 말 듯 한 각자의 이상을 환상으로써 나타낸다고 하셨지. 그리고 그런 아릿한 환상과 현실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려 우리는 취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현학적으로, 또 낭만적으로 표현한다면 어떤 주사든 용서해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말이야.. 실제로는 그냥, 취하면 추하더라. 


잊지 말자: 취하면 추하다.


정말이다. 본인이 아무리 꿈꾸듯 절절한들 취하면, 대부분이 그저 추하다. 특히나 맨 정신인 사람이 옆에서 보기엔 견디기 힘들지. 게다가 1급 발암물질인 술은 정말이지 백해무익함을 또한 잊지 말자. 




그런데 색시야. 

술김에 극대화되는 감정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걸까.


이제는 희화화되곤 하는, 술에 취해 누르는 번호는 정말 그렇게까지 덧없는 걸까. 맨 정신에는 절대 하지 않을 일, 보고 싶지 않고 생각나지도 않을 누군가였을까. 아니면 자존심으로 덮여있던 의식 한 꺼풀을 벝겨낸 솔직한 욕구였던 걸까. 


호르몬과 몸 컨디션에 속지 않는 것이 언제나 나의 신념인데, 가끔은 헷갈려. 




그나저나 색시는 원소주 마셔봤어? 마케팅에 혹하고 싶진 않은데, 사실 박재범의 원소주는 궁금하긴 해. 소주라고 칭해도 될까, 싶은 가격이지만 병이 예쁘더라. 책과 영화를 볼 때 표지와 포스터에 혹하듯 소주조차 패키징 라벨에 또 넘어가 버렸어. 열풍이 식을 때쯤 노려봐야지. 아마 올 겨울엔 나름 손쉽게 구매 가능하겠지? 


구해서 색시랑 오랜만에 한 잔 기울이고 싶다. 특별한 술인 만큼, 이번엔 오랜만에 소맥 말고 소주로만. 






관련 영화:  클래식 오브 클래식.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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