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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Oct 02. 2022

어리숙한 청년의 향에는 소주의 진심이 묻어있다?

시선 13화 [소주] by 색시

주간 <시선> 열 세번째 주제는 '소주'입니다.



소주의 향에는 어리숙한 청년의 진심이 묻어있다. 


라는 감성 어린 도입부 장식해 놓고 현실적인 이야길 먼저 하자면… 나는 이제 가급적이면 소주는 안 마셔 선장아. 사회적 동물로서 술자리에 참석했는데 주문 가능한 술이 소주 맥주뿐이다! 하면 빨간 뚜껑의 두꺼비를 한 병 시켜 놓고 한두 잔 천천히 마시던가 그마저 없을 땐 1:1 비율로 소맥 한 잔 타놓고 홀짝이는 게 전부다. 


내 입맛으론 이 액체를 당최 무슨 맛으로 마시는지 잘 모르겠고(빨간 뚜껑 두꺼비는 그중 낫다. 믿기 어렵겠지만 엄청나게 은은한 포도향이 나, 정말이야.) 숙취가 끝장나기 때문. 다음 날 하루 종일 기어 다니다 초록색 물체만 보아도 화장실로 달려갔던 날이 아마 내 ‘소주와 함께하는 숙취’ 마지막 날이었을 거야. 이제는 그럴 기력도, 시간적 여유도 좀처럼 없으니까. 


허나, 서른 줄의 현실은 잠시 차치하고 다시 감성으로 돌아가 보자. 


소주로 달아오른 취기에 후 - 하고 연신 뱉어지는 숨, 가누기 버거워 보이지만 실은 어떤 액션을 취할지 웬만하면 알고 있는 사지와 몸뚱이, 하지만 이걸 어느 정도까지 표현해야 할지는 점점 어려워지는 마음. 


그간 고요히 차오르던 감정의 호수는 소주 몇 병 덕에 범람 위기를 맞이한다. 


왜, 사람들은 취중고백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낼 때도 많잖아. 술의 힘을 빌려 하는 고백은 찌질하다라든지, 술기운에 뱉는 말들은 다음 날 후회하고 책임지지 못할 말들인 경우가 많다든지… 사실 아무렴 어때, 싶어. 

찌질하면 좀 어때. 진심이란 게 원래 딱히 합리적인 것도, 더 이상 파고들 구석이 있어 매력적인 것도 아닌데. 그것도 술기운 따위의 외부 힘을 빌려 에라 모르겠다 뱉어버리는 진심이면 얼마나 여과 없겠어. 후회될 말이면 또 어때, 이게 어떻게 채워 놓은 마음인데 거짓이든 참이던 밖으로 꺼내는 순간 어떤 종류의 후회든 끌어안고 동동 떠다니기 마련이지 않나. 





잠자리에 들 시간 걸려온 전화들은 공간을 초월한 술내를 풍기며 한 말을 또 하고, 또 했다. 너는 모르지, 내가 얼마나 좋아하고 있었는지 모르지. 왜 그 친구는 되고 나는 안되는 건지. 너는 모르지. 내가 얼마나 … 사랑 고백만이 아냐. 거나하게 취해서는 생전 안 그러던 애가 울기 시작해. 울면서 누나, 누나 내가 많이 힘들어. 그런데 말할 곳이 없어, 어디 가서 힘들다고 하지도 못해. 다들 내가 밝은 줄 아는데… 마음이 이상해져, 응 얘기해 잠이야 덜 자면 돼, 다 들어줄게, 하게 돼. 


소주의 에탄올 향이 역하고 취객의 모습 역시 보기 싫어했으면서도, 스무 살 그 언저리의 어리숙한 진심들은 언제나 울림을 주었다. 그저 친한 오빠, 친한 동급생이던 사람이 술자리가 파하고 데려다주던 길, 집 앞에 다다라 쭈뼛거리며 꺼낸 마음들은 내가 상상도 못할 세월을 거슬렀던지라 적잖이 놀라워 내 취기를 깨우곤 했고. 입대 며칠 전, 겨우 표현한 마음이 무색하게 네가 연달아 뱉은 말은 “어차피 너는 못 기다려. 기다리지 마” 였으면서 왜 내 손은 그렇게 꼬옥 잡고 동네 몇 바퀴를 돌았는지 모르겠고. 한겨울 눈 내리던 밤의 놀이터 벤치에서 술기운에 어렵사리 시도했던 연하남의 입맞춤은 투박하면서도 참 예뻤다, 포근한 공기를 감싸던 술 내음이 그 친구의 향수 냄새와 뒤섞여 기분 좋게 어지러웠던 기억. …


대학가 주점에서 소주 몇 병 세워두고 꿈 얘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때, 맨 정신에는 상당히 간지러울 표현들이 테이블 위에 난무했다. 음악이 하고 싶어,로 시작해서 거지 같은 거 말고 정말 음악이 하고 싶어 성공하고 싶어, 내가 잘 할 수 있는데… 어 - 내가 지금 맨 정신이라 이어 적기가 참 간지러워, 어려워 선장.


사실 진심이야 어딜 가겠어, 사케, 와인, 샴페인, 위스키 더 좋은 술과 함께 흐르는 진심 역시 귀중해. 그렇지만 어째 소주 향을 타고 왔던 진심은 전부, 뭐랄까 투박해. 투박한데 그 자체로 독보적이게 어여쁘다. 추운 겨울 눈싸움을 한창 하고 들어온 어린이의 마알갛고 발그레한 상기된 얼굴처럼. 어 - 술 얘기에 어린이의 얼굴을 빗대다니 내가 지금 와인 한 잔을 마시는 중이라 그래, 선장, 만나서 이야기나누고 싶네. 





추천음반 : 전람회 [Strang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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