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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Oct 07. 2024

오진단으로 15년을 삽질했다니

내겐 너무나 낯선 질병


늦게 발견해서 다행인 게 있을까?


그러니까 15년 전에 충분히 알 수 있었음에도, 굳이 한참 지나 이번 수면검사를 통해 질병을 알게 돼 다행인 부분을 찾자면, 뭐라도 꼽을 수 있을까. 한동안 ‘오히려 좋아!’ 마인드를 연습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가능할까. 그간 학교도, 직장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내게 잘못된 진단을 내려줬던 대학병원에게 고마운 부분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헛짓거리를 해온 이 모든 과정이 소위 럭키빅키가 될 수 있을지 잠시 생각해 봤다. 아이돌은 아무나 하나. 원영이는 대단한 아이였다. 나는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1박 2일의 강제 취침과 강제 각성 끝에 수면다원검사다중수면잠복기검사의 결과가 나왔다. 여섯 시가 다 되어 나는 진료실에 들어갔고,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어휴, 고생 많이 했네."라는 말과 함께 엄청난 분량의 결과지를 내밀었다.


상세하게 기록된 결과지, 그 일부


지난밤, 나는 약 4시간 동안 취침 모드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검사 결과를 짧게 요약하면 아래와 같았다.


수면 효율 59.6% (정상 수면효율: 85% 이상)

평균 5~10분에 한 번씩 깸 (4시간 동안 81번의 각성, 22번의 완전 각성)

한 번도 깊은 수면(N3) 상태에 닿지 못 함: 신체회복과 기억통합이 이뤄지는 단계로 (정상 비율 13~23%)

경증의 수면무호흡증: 약 22초 동안의 무호흡, 45초 이상의 저 호흡(기도의 폐쇄와 같은 물리적 이유보다는, 신경계에서 호흡을 제대로 못 하고 있는 탓으로 보임)

심박수 변동이 매우 큼: 최저심박수(28.4 bpm) 과 최고심박수(150 bpm)의 차이가 커 재검사 요망

경증의 하지불안증: 4시간 동안 29회의 사지 움직임, 8회의 주기적 다리 움직임




수면 효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건 예상한 결과였지만, 이 정도로 자주 깨는지는 몰랐다. 그리고 한 번도 깊은 수면 상태로 진입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수면무호흡, 하지불안증은 '경증'으로, 크게 걱정할 필요 없는 정도의 수치였다.


선생님은 하지불안증 증세를 설명하며 지난밤 병실에서 녹화된 CCTV 영상을 보여줬다. 갑작스레 번뜩번뜩 발이 움직이는 모습이 조금 악령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심해 보이진 않았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정도는 움찔하지 않나 싶었다. 하지만 소수의 사람들에게서만 보이는 양상이라고 하니... 뭐 그간 약을 복용해 온 건 잘한 일이니까 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 사실들을 전부 뒤엎을 한 가지 검사 결과가 남아있었다.




사실 낮동안 이뤄진 다중수면잠복기검사는 애초부터 기면증 진단을 위한 검사였다. 기면증. 내겐 생소한 단어였다. 나와는 함께 묶일 리 없는 질병이라 생각했다.


미디어를 통해 비쳤던 기면증은 지나치게 극단적, 그리고 극적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갑자기 일순 확, 잠들어 쓰러지는 모습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면증 증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일을 겪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낮에 그렇게 잠이 쏟아진다고?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각성이 심해 낮잠을 잘 수 없어서 탈인데. 이는 뇌파검사를 통해서도 뚜렷이 보이는 증상이었다. 피로함과 무력감을 나의 각성이 완전히 이겼으니까.


그런데... 뭐요? 제 결과지에서 기면증이 보인다고요?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적부터 잠과 싸워왔다. 그래도 그땐 지금보다 증세가 훨씬 덜했다. 약 없이 어떻게든 잠을 자긴 잤으니까.


단지 남들보다 잠에 드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조금 더 자주 깨는 정도.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일주일에 5번 정도 가위에 눌리는 정도. 자각몽, 악몽이 잦아 잠과 꿈이 늘 두려웠던 그 정도.


그럼에도 어릴 땐 그저 '내가 조금 별나네' 하고 넘겼다. 이후 정신과를 다니면서도 평범한 '수면장애' 중 하나라고 쉽게 치부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밤에 잠의 효율이 크게 떨어지는 것도, 그리고 자각몽, 혹은 가위눌림과 같은 수면마비를 겪는 것도 모두 '기면증'의 증상이었다.




기면증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했다:

기면증(Narcolepsy), 주로 과도한 주간 졸림증(Epworth Sleepiness Scale), REM 수면으로 빠르게 진입하는 경향, 수면 마비, 환각 등의 증상을 보이는 수면장애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진단이 나왔다. 하지만 기면증에 대한 선생님의 설명을 듣자 그간 나의 증상들이 드디어 이해가 갔다. 특히나 '주간 졸림증'은 단순히 밤에 잠을 잘 못 자서 오는 피로라고 생각했는데, 인과관계가 반대였다. 낮동안의 피로도(자는 상태에 가까울 정도의 졸림) 탓에 깊고 빠른 취침이 불가했던 것이다. 기면증이 없어 낮에 완전한 각성상태가 가능하면, 밤에 깊은 피로도를 느끼고 이어 푹 잘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럼에도 내겐 기면증에 속하지 않는 증상들도 많았다. 이를테면 기면증은 낮동안 과한 졸림으로 인해 언제든 굉장히 빠르게 낮잠을 잘 수 있어야 하는데 나는 불가했다. '기면증'이라고 진단을 내리기엔 겹치지 않는 부분들이 꽤 있었다. 나는 희귀한 기면증 중에서도 더 희귀한 케이스였다. 그런 이유로 선생님은 내 병명을 '기면증'보다는 '과수면장애'라고 칭했다.


과수면장애와 기면증의 원인은 각성호르몬인 하이포크레틴의 부족이라고 한다. 대학병원에서 오진단을 내리지 않았던 한 가지는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다"는 부분뿐이었다. 나는 각성호르몬이 남들보다 부족하게 태어났다. 앞으로도 약물 없이 쉽게 바꿀 수 없는 부분이었다.




과수면장애. 나도, 그리고 여태 다녔던 정신과 의사들도 의심하지 않았던 질병이었다. 대학병원에서 면밀하게 수면검사를 받고, 심지어 꽤 오랜 기간 수면센터에 입원까지 했었는데도 이를 진단해내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기면증', 혹은 '과수면장애'라는 단어를 이 병원에 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의심할 수 있는 분야조차 아니었다. 그리고 반대 방향으로 삽질하고 있었다.


15년 동안 여러 정신과를 다니며 내가 처방받은 약은 각성의 반하는 효과를 가진, 졸림에 치중한 약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내가 복용해야 하는 건 각성제였다. 심지어 추후 단약에 성공해 모든 약을 끊더라도, 꽤 오랜 기간 동안 각성제만은 계속 복용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약이었다.


올해 뇌파검사를 받고서도 반대 방향 삽질은 계속됐다. 지금 이 진단을 밝혀낸, 그래서 너무나 감사한 병원에서조차 여태껏 시도했던 치료법은 각성을 잠재우는 방향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긴 기간 동안 몹시 쓸모없는 짓들을 해왔다. 온몸에 기운이 빠졌다.



발견되기 어려운 질병인 기면증



대학병원의 주치의는 내게 말했다. 나는 '전형적이지 않다'라고. 그래서 어떤 치료법이나 처방을 내리기가 어렵고 애매하다고. 한때는 그 말에 위로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너무나 쉽게 함정에 빠져있었다. 단순히 '특이하고 심한 불면증'이라 치부하고, 다른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도, 알아보지도 않았다.


물론 나는 전형적이지 않은 양상의 약한 기면증인걸 안다. 그럼에도 조금의 증상이 보인다면 의심했어야 했다. 나도, 병원의 의사 선생님들도.  


그리고 빌어먹게도 전형적이지 않아서 나는 앞으로 비싼 돈을 지불하고 각성제를 처방받아야 했다. 국가에서 희귀 질환으로 분류된 기면증은 약값의 대부분을 정부 보조를 받는데, 나는 그 스펙트럼에 미치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나는 '기면증'으로 분류된 환자들과 같은 '기면증 약'을 먹으면서도 아무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기면증'에 미달된 '과수면장애'라면서 또, 빌어먹게도 전형적인 과수면장애의 패턴은 아니라네.


아. 이젠 제발 좀. 전형적이고 싶다.





각성을 억제하는 뇌파치료를 중단했다. 그리고 각성을 증폭하는 각성제를 먹기 시작했다. 얼마 안 지나 바로 며칠 뒤, 나는 말도 안 되는 개운함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커피를 마시지 않고도 정신이 또렷했다. 새 세상이었다.


이럴 수가. 이렇게 간단할 수가. 그리고 이렇게 15년의 기간이 억울하고, 또 허탈할 수가.


병의 증상인 '피로감'을 남들도 다 겪고 있는 '피로감'이겠거니 추정하며, 그렇게 늘 피곤에 찌든 채로 뭐 하나 제대로 하지 못 해온 나의 15년이 아까워서 어떡하지. 내다 버린 듯한 15년이 아까워서 죽겠어서 어쩌지. 맑은 정신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자니 이런 생각들이 한꺼번에 나를 덮쳤다. 속이 울렁거렸다.


언제나 예츨불허에 무작정 낯설기만 한 빌어먹을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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