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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인장 Oct 09. 2024

침대 옆에서 다리 잘린 군인이 노려보고 있었다

최악의 가위눌림

모든 게 불가능할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는 반면

모든 게 가능할 것처럼 느껴지는 때도 있다.

instagram @naoko.machida_art



며칠 전 가위에 눌렸다. 신기하게도 이번에는 생전 처음으로 촉감을 느꼈다.


일단 눈앞에 난데없이 하얗고 긴 팔이 등장했다. 시체같이 휘적이는 팔에 놀라 나 역시 순간적으로 손을 뻗었는데, 그때 난생처음 몸이 움직이더라. 물론 다른 부위는 어김없이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얇고 물컹한 팔은 내가 잡는 대로 후들거렸다. 뼈와 근육이 느껴지지 않는 촉감이 기괴하고 끔찍했다. 그러더니 조금 지나서는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 팔이 사정없이 휘어지기 시작하는 거다. 어쩔 줄 모르고 공포에 넋이 나가 있는데, 설상가상으로 이번엔 시야에 다른 쪽 팔이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내가 필사적으로 잡고 있던 팔을 놓으라는 듯 베개 옆을 마구 치기 시작했다. 부동의 몸이 극한으로 서늘해졌다. 이쯤 되자 나는 가위에서 벗어나는 걸 포기했다.



잠과 늘 사투를 벌이기에 꿈에 대해서는 언제나 할 말이 많다. 어릴 적부터 자각몽, 악몽, 그리고 가위눌림 등의 수면장애를 겪으며 꾸준히 에피소드를 쌓아왔다. 이 또한 그저 유별나다 생각했건만, 이번 수면검사를 통해  밝혀졌다. 전부 기면증의 증상이었다.


그리고 어떤 악몽보다 두려운 게 가위눌림이다. 정신은 깼는데, 몸은 아직 깨어나지 못 한 그 상태에서 오는 두려움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미셸 공드리 <수면의 과학, 2006>


가위눌림으로 겪게 되는 환영의 종류는 다양하다. 천장에 붙어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귀신은 어릴 적에 졸업. 나이를 먹을수록 창의력이 가미돼 귀신은 점점 신선해졌다. 그리고 형태는 점점 괴랄해져 추상적으로 변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환영이 내 방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경험치가 쌓이며 환영은 오히려 현실과 가깝게 진화하기도 했는데, 제일 충격적이었던 장면은 내 침대 옆에 반쯤 앉아 피를 철철 흘리며 노려보고 있던, 다리가 잘린 30대의 군인 남성이었다. 십 년은 더 지났을 텐데도 그 원망스러운 눈이 또렷하다.


그리고 다들 알다시피, 가위에 한 번 눌리면 계속 눌린다. 그러니 가위에서 깨어나는 데 성공한 뒤 그대로 다시 잠에 들면 안 된다. 사이에 깨어있는 시간을 30분 이상은 가져야 안전하다. 하지만 보통 심신이 매우 피곤할 때 가위에 눌리므로, 중간에 깬 이 시간을 버티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래서 그럴 때의 나는 보통 무언갈 먹는다. 정신없이 먹다 보면 시간은 지나있다. 그리고 기분 탓일지 모르지만, 정신과 몸도 아까와는 다르게 어느 정도 싱크가 맞는 느낌이다. 물론 식도염과 위염, 심지어 숙면에도 좋지 않은 방법인걸 안다. 하지만 야밤 중 피로가 짓누를 때 한 번 눌린 가위로 다시 회귀하지 않는 더 손쉬운 방법을 나는 찾지 못했다.



가위눌리는 현상은 불면증과 우울증이 발현되기 훨씬 전인 중학교 때부터 자주 나타났다. 시험기간에는 일주일에 2회는 기본, 많게는 3-4회까지 가위에 눌렸다. 그리고 쉽게 깨게 위한 나만의 노하우를 가지게 됐다.


일단 1) 온몸에 힘을 빼는 법, 그리고 2) 온몸에 힘을 주는 법 두 개의 방법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쉬워 보이지만 성공확률이 낮다. 무언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을 완전히 이완할 수가 없는 것이다.


후자의 방법은 대개의 경우 성공해 내지만, 또 그만큼 힘이 많이 든다. 말 그대로 온몸에 찡그리듯 힘을 꽉! 줘야 하는데, 이게 생각보다 큰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다. 그래서 가위에 눌려 두려운 와중에도, 이 방법을 이제는 아는데도, 감히 엄두를 못 내고 잠시 쿨타임을 가질 때도 있다.


미셸 공드리 <수면의 과학, 2006>


엄마에게 들었던 꿀팁도 있다. 가위에 눌리면 속으로 계속 주기도문을 되뇌는 것이다. 엄마에겐 꽤 용한 방법이라고 하는데, 나에겐 안 통하는 걸 보면 독실한 신자 전용 방법인가 보다.


또 작년에는 어디선가 혀를 내밀면 가위에서 쉽게 깬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도해 봤었다. 놀랍게도 이 방법은 내게 잘 맞았는지 한방에 가위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가위 황금기였던 중학교 땐 벗어나는 법에서 더 나아가 즐기는 방법을 터득하기에 이르렀다. ‘가위눌리는 것을 즐기는 법’을 알려주는 카페를 찾아냈던 것. 가위눌리는 밤이 무섭고 지긋지긋한 카페 멤버들의 처절한 심정이 느껴졌다. 그렇다. 일주일에 반 이상을 가위에 눌린다면 이를 피하기보단 더불어 살아가려 노력하는 편이 영리하다. 그런 영리한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였다. 카페엔 최선에 실패해도 ‘최선의 차선’을 찾으려는 의지들이 기죽지 않고 쌓여 있었다.


즐기는 방법의 핵심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요약하자면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건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눈앞에 나타나는 환영을 컨트롤하자는 것이었다.


일단 가위에 눌렸단 사실을 인지하면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갖고 온몸에 긴장을 푼다. ‘무서운 게 나타나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그 무서운 게 눈앞에 나타나므로 재빠르게 다른 생각에 집중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타이밍이 중요한데, 환영이 보일 듯 말 듯하는 그 찰나에 내가 보고 싶은 무언가를 강하게 떠올린다. 심지어 고도의 집중력으로 내 몸을 보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유체 이탈을 경험할 수도 있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스윽 하고 영혼이 분리되는 모양새는 아니고, 어느 순간 몸에서 훙덩 빠져나와 있다. 그러면 사실 이 상태는 가위눌림에서 자각몽에 가까워진다. (오히려 좋다. 이제는 창문을 찾아 하늘을 날 수 있다)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와 몸을 분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대신, 여러 차례 연습 끝에 환영을 골라 띄워내는 일에는 어느 정도 숙달이 됐다. 귀신이나 끔찍한 형상이 아닌, 내가 보고 싶은 환영을 골라 볼 수 있다는 건 실로 진귀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강동원을 되뇌었다. <늑대의 유혹> 후 내 올타임 페이보릿 배우를 환영으로라도 마주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늘 실패했다. 보통 내가 애정하고, 또 보고 싶은 무언가보다는 뜬금없는 사람이나 상황을 상상했을 때가 타율이 높았다. 야한 생각을 하면 그것도 종종 이루어졌다. 원하는 상대는 역시나 불가능했지만…



제일 최근의 가위는 여태 겪었던 것들과는 한참 업그레이드 돼 더 당황했다. 다시 초보 가위러로 돌아가 정신없이 당하기만 했다. 시체 같은 팔에 대고 메롱을 할 생각은 꿈도 못 꿨다.


나는 다짐했다. 다음에는 방심하지 말고, 혀 내미는 방법을 잊지 말고, 만발의 준비를 해놔야겠다고. 행여 혀를 내미는 방법으로도 가위에서 깨지 못한다면 그때부턴 계속 되뇌어볼 것이다. 기억나는 온갖 화보들을 모조리 떠올리며, ’강동원, 강동원, 강동원‘ 하면서. 초초초고도의 집중력을 끌어모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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