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면의 심리적인 원인은 마치 불륜의 이유와도 같다고.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강윤희 역의 이지아가 말했다. 불륜은 생각해 보면 모든 게 원인 같다가도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무엇도 원인 같지가 않다고. 십 수년째 불면증의 원인을 찾아 헤맸던 사람으로서 내게 그 대사가 퍽 절절했다. 불안의 기저에는 탓할 대상이 너무 많다. 엉킨 채 혼재되어 있어 어떨 땐 이게 원인 같고, 다른 땐 저게 원인 같다.
그럼에도 굳이 불면증을 일으킨 하나의 계기를 꼽자면 어떨까.
앞서 말했듯 나는 아침에 커피 한 잔을 마신다. 그렇다면, 불면의 원인이 커피에 있을까? 카페인도 불면증에 지분을 차지하고 있겠지만 그리 많은 역할을 하진 않을 것 같다. 답은 현재가 아닌 불면증이 발현되기 한참 전 과거에 있다.
20대 때 첫 대학병원 수면검사 후.
"뇌 구조가 그렇게 태어났으니 받아들여라"라는 선생님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던 나는 불면의 심리적 원인을 찾고자 했다. 그래. 유전적으로 타고난 부분은 어쩔 수가 없다 치지 뭐. 내가 바꿀 수 있는 것부터 바꾸면 뭐라도 낫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뇌 구조가 그 모양 그 꼴로 태어났더라도 불면이 발현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혹은 언젠가 꼭 나타날 증상이었더라도, 이 정도로 오랜 기간 지속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불면에 트리거가 된 어느 한 시점이 분명 있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결국 정신과와 심리상담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 불면의 원인에 앞서 불안의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불안이 증폭된 계기가 분명 내 과거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유년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어릴 적부터 나는 사실 툭하면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몸도 아픈 거라고 대충 결론짓고 살았다. 그럼에도 사실 계기라 칭할 수 있는, 짐작이 가는 사건이 있긴 하다. 학창 시절 트라우마로 남은 기억들이다. 단언하지 않고 회피해 온 이유는 그 엉망진창인 기억을 어떻게 다시 꺼내어 곱게 포장할지 막막해서였다. 굳이 끄집어낼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다. 그때의 나 자신에게 지금의 나 자신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더 성숙해진 뒤에 돌아보고 싶었다.
그렇게 겁 많은 나는 원인을 다른 데에서 찾으려 했다. 하지만 불안은 지속되었고 나아지는 건 당연히 없었다. 저 깊이 묻혀 있던 가장 큰 나의 불안의 원천을 마주해야 했다.
모든 완벽해 보이는 것들에도 뜻밖의 비밀과 아픔이 있고, 이를 발견하기엔 세심한 관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결국, 이미 타이밍은 지났고 모든 게 망가져 버린 때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멀쩡해 보였던 모든 것들을 모조리 분해한 다음 하나하나 맞춰보며 균열을 찾아내면 된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과거 일들로부터 2차 피해를 받고 싶진 않다. 하지만 깊숙한 곳에 눌러뒀던 아픈 기억들은 의식적으로 무시하면 할수록, 무의식의 저편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러니 나는 <데몰리션> 속 제이크 질렌할로 분해 덮어뒀던 나의 과거를 전부 끄집어내고, 또 헤집어 놓기로 했다. 그리고 이 녹슨 기억을 정리하고, 재저장한 뒤, 나아가기로 했다.
시작은 역시, 열 일곱살의 텍사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