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발화점
대수롭지 않게.
파국화가 특기인 나는 심각해질 때마다 이 말을 되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내 문제' 한정. 누군가 지난밤을 유독 어렵고 더디게 보냈다면 나는 차라리 대수롭고 싶다. 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그러려고 했고, 그럴 수 있다 생각했다.
열일곱의 나는 난생처음 부모님 곁을 떠나 출국장을 향하는 순간에도 마냥 발걸음이 가벼웠다. 가족의 눈물겨운 배웅을 웃어넘기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어리기에 무모했다. 말 그대로 '대가리꽃밭'이었다. 꽃밭에는 미국이라는 꿈의 나라에 대한 환상만이 가득했다.
당시 국가 간 문화 교류를 위해 유행하던 교환학생 제도는 유학비 부담을 줄인다는 명목 하에 공립고등학교 등록금과 홈스테이 생활비를 전액 지원하고 있었다. 검증이 끝난 미국 쪽의 호스트 패밀리가 전적으로 집에 들일 교환학생을 고를 수 있었고, 나는 그렇게 스캇(Scott) 부부가 사는 텍사스로 가기로 결정됐다. 값이 거저인 만큼 선택권은 없었다.
30대 후반의 스캇 부부에겐 9살 세 쌍둥이 자녀가 있었는데, 각각 파란색, 초록색,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의 세계에서 온 나는 그들의 형형색색 눈동자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짐작조차 못했다. 대부분의 다른 교환학생들은 비슷한 또래의 자녀가 있는 호스트 패밀리에 지정되었다는 사실을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됐다. 그리고 최소한의 프라이버시를 위한 개인방이 지원되는 것도. 초등학생 아이와 작은 방을 나눠 써야 했던 나와는 달랐다. 서서히 불운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결국, 공짜로 먹여주고 재워주는 불공평한 상황에서 스캇부부가 내게 기대한 것은 한마디로 베이비시팅(babysitting), 바쁜 그들을 대신해 어린 자녀들을 돌봐주는 것이었다. 문화교류 따위가 아니었다. 1:3의 강제적 베이비시팅에 지쳐가던 나는 이 고충을 다른 교환학생에게 토로했다. 그리고 이게 모든 일의 불씨가 됐다.
말은 점점 더 부정적이고 극단적인 쪽으로 전달됐다. 한국인이 독일인에게, 그리고 독일인이 미국인에게 전해지는 과정에서 언어장벽 또한 오해를 키우는 데 큰 몫을 했다. 그렇게 한차례 스캇 부부와의 소동이 있었다. 삼자대면 끝에 오해는 해결된 듯 보였지만 그때부터 호스트마더인 로빈 스캇(이하 로빈)의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히스테리컬 하게 소리를 지르는 일이 잦아지더니 어느 날부턴가 내게 밥을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설거지는 내 몫이었는데, 물을 많이 쓴다고 매번 욕을 했다(한국과 미국은 설거지문화가 매우 다르다). 내 긴 머리가 마음에 안 든다며 200불이 넘는 돈을 주고 억지로 머리를 자르게 했으며, 무난한 집안일로는 성에 안 찼는지 칫솔로 바닥 타일 사이사이를 전부 닦게 했다. 같은 방을 쓰는 9살 꼬마아이는 오후 여덟 시면 잠에 들어야 했기에 나는 푹푹 찌는 다락방 당구대 위에서 숙제를 해야 했다.
방이나 거실 어느 곳에서도 나는 의자나 침대 위에 앉을 수 없었다. 까만 머리카락이 너무 많이 떨어지고 이불 모양새를 망쳐놓는다는 이유로 나는 언제나 바닥에 쪼그려 앉아있어야 했다. 다락방 청소 또한 내 몫이었는데 로빈의 성에 차지 않으면 로빈은 비교적 가벼운 물건들을 골라 내게 던졌다. 이를테면 슬리퍼를 머리에 맞았던 날도 있었다. 학교에 데려다주지 않아 길거리에서 한 시간 반 남짓 통근버스를 기다려야 했다. 그 긴 시간 동안 Daughtry의 home을 반복재생했다. 한국에 갈 날만을 디데이로 매일 카운팅 했다.
이런 환경에도 버텨야 했던 이유는 그놈의 비자 때문이었다. 당시 교환학생은 특수한 비자를 발급받았는데, 홈스테이 가정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온다면 미국에 한동안 입국이 불가한 불합리한 규정이 있었다. 심지어 이 프로그램의 지역담당자는 홈스테이 엄마의 절친이었다. 상황은 내게 한없이 불리했다.
로빈의 괴롭힘은 처음엔 유치하더니, 점점 더 잔인해졌다. 그리고 뻔뻔하고 적나라해지기까지 했다. 엄마의 투명한 악의가 낯설었던 초록눈의 9살 소녀는 “I told my mom stop being mean to you.”라며 날 위로했다. 호스트파더 조엘은 로빈의 행동이 상식선에서 점점 벗어나자 로빈과 매일 다퉜다. 경찰관이었던 조엘은 늘 바빠 자주 보지 못했지만 로빈의 만행을 눈치채고 있었고, 이를 매번 막으려 했다. 그러나 역시, 역부족이었다. 홈스테이 가족들이 나를 위할수록 나에 대한 로빈의 적개심은 커져만 갔다.
매일밤 부모님에게 전화할 때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부모님은 어떻게든 딸이 눈칫밥을 덜 먹었으면 하는 마음에 생활비를 훨씬 뛰어넘는 선물들과 외식비를 보내왔지만 로빈은 이를 전부 무시하고 폐기했다. 정신이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다. 이쯤이면 미국이 다 무슨 소용일까. 결국 예정된 날짜를 두어 달 남긴 시점에 나와 가족은 중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이대로 평생 미국이란 땅덩어리에 발을 딛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저 로빈과 떨어질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하지만 조엘은 나의 결정에 완강히 반대했다. 그는 처음부터 규정되었던 대로, 교환학생 기간 10개월을 모두 채운 뒤 나를 한국에 보내려 했다. 훗날 내가 비자 문제로 불리한 상황이 생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몇 달만, 며칠만 더 참고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며 나의 마음을 다잡아주려 했다. 그리고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은 자괴감에 빠진 나에게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길 독려했다. 조엘은 차분하게 로빈이 나에게 왜 이런 행동들을 하는지 설명해 줬고, “전부 로빈의 잘못인데 결과적으로 네게 억울한 상황이 생기면 안 된다”며 감싸줬다. 그리고 내가 떠나는 날 아이들과 함께 날 안아주며 말해줬지. “We love you.”라고.
조엘이 말하길 갓 중학교 교감에 부임한 로빈은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직장에서 받은 화를 내게 전부 풀고 있는 거나 다름없다 했는데, 여기에 개인적인 문제까지 더해져 제정신이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그 '개인적인 문제'는 열일곱 살의 내겐 낯설었다. 가족문제도, 친구문제도, 그렇다고 돈문제도 아니었다. 낯선 만큼 합리화되지 않는 구실처럼 들렸고 거부감이 일었다. 나는 로빈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로빈은 심각한 불면증을 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