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더닝크루거 효과
잠은 눈꺼풀을 덮어 선한 것, 악한 것, 모든 것을 잊게 하는 것 - 호메로스
기면증 약을 처방받고 2주 뒤, 경과보고를 위해 병원을 찾았다. 간호사는 내게 물었다.
"약은 좀 맞으세요?"
나는 호들갑을 떨며 대답했다.
"미쳤어요. 말도 안 되게 좋아요. 너무 신기하고... 진짜 미쳤어요. 진작 복용할 것을 지금까지 뭐 한 건가 싶어요."
그러자 간호사는 다행이라는 말과 함께 말했다.
"기면증인걸 알게 되고 처음으로 약을 처방받은 환자분들 모두 그렇게 말씀하세요. 지난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신이 잔뜩 난 나는 그제야 미뤄뒀던 약속들을 모조리 잡기 시작했다. 탁상 위 캘린더는 소중하고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으로 전부 채워졌다. 그리고 조금 지나 전 직장 팀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제 다시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됐다고. 그러니 도와달라고. 팀장님은 내게 3주 안에 기획안 10개를 써오라는 숙제를 내줬다. 빠듯했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의 날들이 그저 설렜다.
나는 그렇게 희망찬 일들을 한껏 벌여놓고 있었다. 지난 일의 교훈은 잊은 지 오래였다. '더닝 크루거 효과'의 '우매함의 봉우리'처럼, 희망의 절정을 찍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 같은 순간이 오래갈 리 없지.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아 약효가 떨어졌다. 그리고 각성할 수 있는 시간이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8시간에서 4시간으로 줄었을 때, 나는 결국 기면증 약의 복용량을 늘렸다. 어느덧 나는 '과수면장애'의 복용량을 넘어 '기면증 환자'의 복용량 이상을 먹고 있었다. 물론, 정부의 지원은 여전히 받을 수 없고. 나는 여전히 ‘전형적인 환자’에서 벗어나 있었다.
두 배로 용량을 늘린 뒤, 또 잠깐 "아 이제 살겠다"의 매직을 느꼈다. 하지만 또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각성 효과가 폭락했다. 더 이상 복용량을 늘릴 수도 없었다. 뭐지. 벌써 '절망의 계곡' 타이밍인가. 그럼 이제 뭘 어찌해야 되지. 그때쯤이었다. 전 남자 친구가 읽은, 그 푸념 가득한 글을 썼던 날은.
https://brunch.co.kr/@cisun/78
역사는 되풀이되는데도 왜 우리는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 라는 국가적이고 거시적인 난제는 한없이 미시적인 '나'에게 그대로 적용됐다. 15년 동안 그렇게 기대와 실망의 인과를 반복하며 진저리 쳤음에도 이상적인 희망을 가졌다. 지금의 상태가 앞으로 평생 지속될 것만 같은 꿈을 꿔버렸다.
병명을 새롭게 밝힌 건 또 처음이니 뭐라도 다르긴 다를 줄 알았지. 아무리 그래도 적당히 기대할걸. 그날 그날의 개운함을 충분히 즐기되, 미래에 대한 지나친 기대는 경계할걸. 너무 들뜨지 말고 자중했다면 지금 상태가 덜 괴롭지 않았을까.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잘은 모르겠지만 하나 분명한 건, 실망의 마음도 자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기대뿐만 아닌 실망 역시 경계하기로, 혼자 비련을 떠안은 듯 굴지 않기로 했다. 대수롭지 않아야 한다.
최대한 빨리 툭툭 털고 다음 스텝으로 향해야지. 다시 매일 사소한 즐거움을 군데군데서 발견해야지. 세 잎 클로버에도 네 잎인 양 언제나 기뻐했던 나니까 할 수 있을것도 같다. 아니. 할 수 있다. 마음을 다잡고, '깨달음의 비탈길'처럼 나의 일상도 천천히 나아질 수 있길 바라면서.
자.... 이제는 뭘 더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