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구라자카
낮에서 저녁으로 접어드는 애매한 시간, 시로카네에서의 일정이 끝났다. 땡볕에서 걸어다니느라 조금 녹초가 되었다. 사실 시로카네에서의 하루는 솔직히 말하면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훌륭한 곳이지만, 내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루를 온전히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에 더 아쉬웠다. 남은 시간은 어디에서 보낼까 생각했다. 새로운 곳을 가볼 수도 있었다. 도쿄는 넓어서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았다. 심지어 도쿄를 처음 찾는 여행자들도 방문하는 신주쿠나 하라주쿠도 가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니 난 카구라자카에 있었다. 연이틀 같은 장소에 온 것이다. 정말 가성비 떨어지는 일정이 아닐 수 없다.
출구를 나오니 특이하게 생긴 건물이 보였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나무계단을 올라갔다. 건물 위엔 la kagu라고 써있었다. 얼핏 ‘라 카구’라는 이름을 들은적도 있는 것 같다 생각했다.
계단에 올라 뒤를 돌아보니 카구라자카가 시작되는 카모메 북스가 저 멀리 보였다. 갈매기가 비행하는 파란 하늘색 같은 차양이.
라 카구는 옷가게, 혹은 카페 같기도 했다.
가장 윗층은 옷가게였다. 주로 남성복이었다. 인디고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돋보이는 패브릭 디스플레이였다.
인디고, 네이비톤의 외에 따스하고 여성스러운 제품도 진열되어 있었다.
의류제품 외에 작은 서가도 있었다. 라 카구는 옷가게, 서점, 카페가 결합된 ‘문화를 파는 복합상점’이었다. 무인양품 MUJI 에서 받은 인상과 유사했다. 비록 물건을 하나도 사지는 않았지만, 구경만으로도 눈이 즐거워졌다.
지붕에서 땅으로 이어지는 꼭대기층 계단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곳엔 환상적인 뷰가 있었다. (아직 가보지는 않았지만) 비싼 돈을 주고 올라가는 스카이트리의 전망보다, 높지 않더라도 이런 고즈넉한 분위기의 정경이 좋다.
여행 일정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잠시 라 카구의 계단에 앉아 카구라자카 골목을 내려다보았다. 대련 성해광장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
라 카구를 방문하기 2년 반 전, 근로자의 날 연휴를 맞이하여 중국 대련으로 여행을 떠났다. 대련은 볼거리가 많은 도시는 아니었지만, 깨끗하고 조용하며 정갈한 중국 해안도시였다. 3박 4일의 일정동안 가장 인상깊었던 곳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광장이라는 성해광장이었다.
다른 블로그에서, 대련에서 이 성해광장만큼은 꼭 가봐야한다는 글을 보고 '설마'라고 생각했다. 사실 큰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니까. 넓은 공간과 사람들말고는 딱히 볼게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렇긴하다. 단지 거기에 '바다'가 추가됐을 뿐. 그런데 신기한게, 1+1은 2가 아니더라. 성해광장은 1+1이 10이 되는 곳이다.
펼쳐올라간 책장의 끝자락에 걸터앉았다. 바다 내음을 맡을 수 있었고, 살짝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햇살은 따사로웠고 바닥에 닿은 다리는 뜨거웠다. 머리는 차갑고 다리는 뜨거웠다.
광장을 방문한 친구와 연인들,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들. 그들의 여유와 행복이 타지에서 온 나에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대리석 바닥과 공기를 통해.
수많은 인파 속의 나.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가 들리는 곳에서 혼자인 나. 그래서 진정 자유인이 된 느낌을 누렸다. 사실 이맘때쯤 나를 괴롭히는 고민거리 하나가 있었는데 (이 여행은 해방구이기도 했다) 100프로 홀가분해졌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침착하게 생각을 정리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곳은 그냥 좋았다, 아무 특별한 것이 없었음에도. 그날의 인상으로, 성해광장은 '자유'의 상징으로 기억에 남았다.
- 2015년 대련 여행기
라 카구에 앉아 있었던 그 몇 십분은 이 여행뿐만 아니라 내 삶에서 여유를 돌아보게 하는 성찰과 휴식의 시간이었다.
라 카구의 투명한 유리창으로 노을이 비쳤다. 하늘이 빠르게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계단에 앉아 카구라자카 초입을 바라보니, 처음 라 카구에 들어갈 때 보았던 짙은 파스텔톤 스카이블루의 카모메 북스가 보였다. 다음 행선지는 자연스럽게 카모메 북스로 정해졌다.
Kathie
식도락과 예술, 도시에 관심이 많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그리고 공간 그 자체에 대한 글을 씁니다. 도시의 자연과 로컬문화를 사랑하므로, 여행에세이보다는 도시에세이를 지향합니다. 여행에세이 <나고야 미술여행>을 썼고, 도시에세이 <나는 아직 도쿄를 모른다>를 연재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