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보드카 토닉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22위에 선정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도쿄를 배경으로 한 영화이고, 원제는 <Lost in Translation>이다.
나는 영화든, 소설이든, 그림이든, 로케지의 매력이 드러나는 작품을 좋아한다. 게다가 작품에 술이나 칵테일이 등장한다면 금상첨화인데,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도쿄를 상징하는 장소들이 쉴틈 없이 등장하며, 그중 대표적인 로케지인 신주쿠 파크 하얏트 호텔의 뉴욕 바에선 주인공들이 주야장천 술을 마신다. <마리 앙투아네트>, <처녀 자살소동>을 연출했던 감독답게 서사성보다는 미장센에 중점을 둔 듯하다.
이야기의 스토리라고 해봤자, 각자 배우자가 있는 두 남녀 주인공들이 도시에서 ‘군중 속 구성원’의 외로움을 느끼다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서로 끌리는 감정을 느꼈으나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고 제 갈길 간다는 내용이다.
나는 줄거리보다 영화에 나온 ‘뉴욕 바’가 기억에 남았다. 주인공들은 바에서 항상 마시는 것만 마신다. 빌 머레이는 일본 위스키를 온 더 락으로 마시고, 스칼렛 요한슨은 보드카 토닉을 마신다. 그냥 단순히 마시는 장면만 나오는 게 아니라, 직접 칵테일의 이름을 말하며 주문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스칼렛 요한슨은 “보드카 토닉 주세요.”라며 칵테일의 이름을 얘기한다. 사실 이름을 얘기하지 않았더라면, 저 밝게 빛나는 투명한 칵테일이 보드카 토닉인지, 진 피즈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술 마시는 장면이 등장할 때마다 보드카 토닉만을 마시던 주인공의 모습은, 단골가게에 가서 “항상 마시던 걸로 주세요.”라고 주문하는 것과 동일한 임팩트가 있었다.
아마 그녀는 단골 바를 떠나 처음 가보는 바에 가서도 보드카 토닉을 주문할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보드카 토닉의 전문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어느 카페에 가더라도 항상 블랙커피만을 마시지만, 바에선 꾸준히 하나만을 주문해 마셔본 클래식 칵테일이 없는 것 같다.
한때, 럼에 진저에일이 들어간 보스턴 쿨러 칵테일에 빠져서 새로운 바에 갈 때마다 주문한 적이 있었다. 도산공원의 바에서 인생 보스턴 쿨러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여행을 가서 느꼈지만 보스턴 쿨러가 뭔지 모르는 바들이 꽤 많았고, 확실히 보드카 토닉보다는 범용성이 떨어지는 칵테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이후론 그냥 새로운 바의 시그니처 칵테일 위주로 마셨던 것 같다.
논현동의 바에서 프리미엄 보드카와 일반 보드카인 스미노프 레드 시음을 해보다가 오랜만에 보드카 토닉이며, 보스턴 쿨러가 떠올랐다.
보드카는 다른 향은 없고 알코올 고유의 향만 간직하고 있어서 그냥 마실 때는 소주를 마시는 듯 괴롭지만 칵테일의 재료가 되면 하얀 도화지처럼 다른 재료의 맛을 살려준다.
프리미엄 보드카가 들어간 보드카 토닉은 맛이 지나치게 깔끔하여 보급형인 스미노프 레드가 들어간 편이 더 나았다. 오랜만에 보드카 토닉을 마시니 도쿄에 또 가고 싶어 졌고, 동시에 나만의 ‘보드카 토닉’을 빨리 찾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