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호’가 ‘호’로 변하는 순간
주말에 와인을 사러 이마트에 갔다. 와인 매장 옆에 맥주 시식코너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스텔라 아르투아와,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호가든이 있었다. 나는 당연히 스텔라 아르투아를 시식하고 싶었지만 한 발 늦었다. 이미 아버지가 호가든을 마시겠다고 말씀하셔서 점원이 호가든 캔을 따버렸다.
내가 스텔라를 못 마셔서 아쉬운 기색을 보이자 아버지가 호가든이 싫냐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예전부터 호가든에서 ‘동전 맛’이 나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신촌에 병맥주를 골라 마시는 하얀 네온사인의 맥주집이 있었다. 그곳에서 대학 새내기 시절에 선배들이 사준 호가든 병맥주를 마신 게 처음으로 호가든을 마셔본 기억이었다. 첫인상이 안 좋았던 맥주였다. 마시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던 것 같다. 왜 맥주에서 동전 맛이 나지?
오랜 시간이 흘러, 호가든의 라벨을 제대로 보았을 때 왜 동전 맛이 났는지 깨달았다. 호가든은 벨기에의 밀맥주지만, 밀만 들어간 게 아니라 오렌지 필과 고수 씨앗이 함께 양조된 맥주였다. 내가 ‘동전 맛’이라고 느낀 특유의 향은, 내가 멕시코 음식이나 각종 동남아 음식을 먹을 때 가장 큰 진입 장벽이 되는 ‘고수’의 향이었다. 태생부터 나와 상성이 맞지 않는 술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니 입맛이 변해서일까 아직도 고수라면 꺼림칙하지만, 오랜만에 마트 시식코너에서 마셔본 호가든은 부드럽고 크리미 하며 상큼하기까지 했다.
결국 난생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호가든을 편의점에서 사 왔다. 안주는 생일선물로 받은 발라즈의 딸기 치즈케이크(일명 딸치케)였다.
의외로 치즈 케이크와 호가든은 궁합이 괜찮았다. 주말에 화이트 와인과 함께 먹었던 치즈 케이크의 조합보다 잘 어울렸다.
치즈 케이크 특유의 무거움을 호가든에 내재된 허브향이 상쇄시켜주는 듯했다. 항상 거북하다고 생각했던 코리엔더 향도 케이크의 딸기향과 만나니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원래 배가 불러서 맥주 한 캔을 다 못 마시는데, 오늘은 그 싫어하던 ‘호가든’ 한 캔을 다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