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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티하이커 May 13. 2020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것

교문동 삼미당

2020년 5월 12일 화요일,

흐림


오늘 글의 제목은 정수복 선생님의 책 <파리 일기> 중 4월 5일 일기의 제목과 같다.

책을 읽으면 2002년 오랜만에 파리로 돌아와 교외의 알포르빌에서 지내다가 건물 사고로 임시 거처에 머물고, 고생 끝에 파리 16구에 방 세 칸짜리 아파트를 구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일기엔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어려움을 묘사되는데, “새로운 장소에 이주하여 뿌리내리는 적응 과정은 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장소에 이주하여 뿌리내리는 적응 과정은 아주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생존과 일상생활에 관련된 일들을 해결하는 작업으로 시작한다”는 구절이 마음에 들어 형광펜으로 노랗게 칠했다. 뒤이어 나오는 구체적인 예시들이 백미인데, 해야 할 일들은 분명 숙제인데도 불구하고 책에서 묘사된 일들은 나를 설레게 했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드는 일, 매일 다니게 될 동네의 빵집과 슈퍼마켓을 찾아내는 일, 파리의 지하철과 버스 노선을 익히는 일, 일상의 산책로와 단골 카페를 정하는 일...(후략)


<파리 일기> 중 이 본문이 특별하게 느껴진 이유는 나도 어제 이사했기 때문이다. 같은 행정구역 내 이동이라 멀리 이사하진 않았지만, 2년 전의 이사와는 달리 생활권이 달라지는 동네로 이사 왔다.

20년 가까이 살았던 옛집에선 한강이 보였고, 직전의 2년 살았던 집은 호수가 가까웠다. 지금 집은 흔히 말하는 숲세권이라 창밖 가득 나무만 보인다. 온 세상이 초록 초록하다. 삼분의 이는 녹색이고, 나머지 삼분의 일은 하늘과 구름이다. 오늘 새로운 집에서 아침을 맞으니 낯설어서 그런지 여행 온 것 같았다. 마치 파리나 런던의 민박집에서 여행 첫날을 맞이한 느낌 같았다.

어제는 이사를 마치고 부모님을 모시고 ‘삼미당’이라는 요리주점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운영한 지 3-4년 이상된 곳인데 생활권이 다르다 보니, 메리네​에 갔다가 작년에서야 알게 된 곳이었다.

낡은 건물을 고친 인테리어가 독특하고 매력적이었고, 아버지가 꼭 가보고 싶어 하셨는데 술집인지라 운전 때문에 좀처럼 못 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이사를 하니 도보권이 되어, 이사를 마친 기념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게 되었다. 모두가 만장일치였다.

한라산 소주와 레몬 슬라이스, 토닉 워터가 제공되는 한라 토닉 세트를 주문했는데 잔이 정말 예뻐서 술도 더 맛있게 느껴졌다. 테이블 자리의 앤틱 한 감성과 잘 어울리는 잔이었다.

가쿠 하이볼이나 짐빔을 하이볼로 만드는 다른 가게들과는 달리 일품진로 하이볼이 있었다. 위스키가 아닌, 오크통에 숙성시킨 ‘소주’라 그런 건지, 아니면 진저에일이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빛깔이 투명한 하이볼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먹었던 추억 속 새빨간 열기 구이를 안주로 먹었다. 속초에서 잡은 반건조 열기를 간장소스에 구웠는데 부모님이 아주 좋아하셨다. 참소라 봉골레는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을만한 메뉴인 것 같다.

모두가 입을 모아 칭찬했던 안주는 차돌 두부조림으로, 고추장 소스도, 데리야끼 소스도 아닌 맛이 묘한 중독성을 자아낸다. 보통 이런 안주엔 고기가 쥐꼬리만큼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두부 밑에 차돌박이가 풍성하게 깔려 있었다.

게다가 문배주도 메뉴에 있는 게 아닌가. 문배주를 파는 곳이 거의 없어서 어디에서 문배주를 마셔보나 싶었는데 삼미당에 있었다.

정수복 선생님이 낯선 곳에 정착하려면 찾아야 한다고 하셨던 ‘단골 카페’. 비록 카페는 아니지만, 단골 술집은 찾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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