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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티하이커 Dec 28. 2020

여행은 계기가 있으면 좋겠어

2016년 12월 24일 토요일


많은 사람들이 여행에 미쳐있다. '여행을 가는 것'이 하나의 거대한 트렌드가 되어 버렸다. 때로는 휴가를 가지 않는 사람은 고루하고 도전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사실 나 역시 여행에 미쳐있다.

이래선 안 되겠지만 여행 중독이 점차 심해져 비행기 티켓을 끊는 것이 강박처럼 변했다. 언젠가부터는 수중에 대기하고 있는 비행기표가 기본 두세 개가 되었다. 모든 게 '처음'만이 무서운 법이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행은 심사숙고하여 일 년에 단 한번 지르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횟수를 세어보니 올해는 거의 두 달에 한 번 꼴로 비행기를 탔다.

사실 부끄럽지만 나의 꿈은 여행을 소재로 글을 쓰는 것이라, 그걸 핑계로 비행기로 바다를 건너고 하늘을 날아 낯선 땅을 밟고 내 생각과 여정을 기록했다. 물론 그에 대한 지출은 상당히 크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2016년의 지출이 너무 심했기에, 파리 마일리지 항공권을 발권한 후로는 (어차피 마일리지라 추가 비용은 크게 들지 않았다) 그 어떠한 여행 계획도 짜지 않았고 티켓팅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준비된 여행이 끝나고, 수중의 티켓이 동난 후에 그때 비로소 새로운 티켓을 끊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건만, 2017년의 황금연휴가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지난주 대전으로 출장 갔을 때, 그곳의 상사들은 모두 여행을 사랑하는 분들, 자칭 여행 고수분들이셨다. 그분들은 5월과 10월 황금연휴에 티켓팅을 하지 않은 나를 안타까워하시며, "하루만 휴가 내면 열흘이 나오는데 그걸 안 했어? 야, 이미 싼 티켓은 다 팔렸다. 5월꺼는 물 건너갔을 거고 10월이라도 빨리 알아봐."

그때도 난 흔들리지 않았다. 내겐 6월의 파리가 있으니까. 5월엔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에 가거나 티켓을 못 구하면 집에서 쉬지 뭐,라고 넘겼다. 10월은 조금 불안해졌지만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동기 언니와 식사를 하며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여행점'에 불이 붙어버렸다. 언니는 나를 위해 유럽과 미주의 저렴한 티켓을 검색해주었고, 결국 가을 연휴를 위한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의 뉴욕행 티켓을 발견했다.

그 이후로 플랜 B, 플랜 C에 해당하는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애틀, 밴쿠버, 멜버른행 티켓을 줄줄이 찾아냈고 나는 사랑의 열병을 앓는 소녀처럼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예전에 사두었던 방구석의 미국 여행책을 읽어 내려갔다. 뉴욕 뒤에 있은 샌프란시스코에 꽂혀 버려서, 게다가 80만 원대 직항이라는 착한 가격에 반하여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스마트폰이 쉽게 도난당하고 거리에 노숙자들이 많은 치안 현실에 갈등을 거듭했다.

오늘 아침에는 인구 50만 이상 대도시 중 가장 안전한 미국 도시 순위를 검색하고 '그래, 뉴욕을 가자!'라고 결심한 뒤, 내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서점에 갔다.

<샌프란시스코 홀리데이>를 뒤적이며 샌프란시스코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갈팡질팡하다가, <론리 플래닛 디스커버 뉴욕>을 읽고 10월 연휴에 뉴욕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티켓을 예약한 후, 이 모든 일련의 상황에 찬물을 끼얹는 문구를 발견했다.

"출국일 기준, 여권 만료일로부터 6개월 이상 남아있지 않으면 출국을 할 수 없습니다."

아뿔싸, 10월이면 여권 만료일로부터 한 달 그리고 며칠 정도만 남아 있는 상황. 당장 6월에 떠나는 파리 여행도 문제가 된다.

어쨌든 일단 여권을 갱신하기 전까지는 뉴욕행 티켓을 구입할 수 없게 되어 버렸고, 그제야 나는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행에 대한 준비 없이 그저 싸다는 이유로 비행기표를 지르고 있는 내 모습. 이 여행지가 가고 싶어서, 그 장소에 가고 싶은 이유가 생겼기 때문에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가격 하나 때문에 여행지가 결정되는 풍경. 그것은 마치 적성이 아니라 수능 점수에 맞춰 전공을 결정하는 수험생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여행에는 계기가 필요해"


단지 싸서가 아니라, 반드시 그 장소여야 하는 이유 말이다.

지금 당장 티켓팅을 하지 않아 가격이 올라 몇 푼 손해를 보더라도, 혹은 가격이 너무 올라 황금연휴에 여행을 떠나지 못하더라도, 그래도 괜찮다. 여행을 가야 하는 이유를 찾은 후에 여행을 떠날 것이다. 빡빡하고 잘 계획된 일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행지를 향한 애정이란 걸, 최근의 홍콩 여행에서 절감했다.​ How보다 Why가 중요한 건 업무나 프레젠테이션, 글쓰기뿐만 아니라 여행에서도 중요하다.

Michelle Shaprow의 <Hong Kong>에 이끌려 홍콩행 비행기를 타고, 긴자의 유서 깊은 바 <루팡>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짐을 싸 떠났던​ 지난 여행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찬란한 경험이었던가.

그래, 나는 여행을 떠나려면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퐁피두 센터의 <이카루스> 그림을 보려고 마일리지 티켓을 런던행에서 파리행으로 바꾼, 바로 그런 계기. 그런 동력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여행의 버킷 리스트가 되고, 설령 다른 일정은 조금 양보하거나 포기하게 되더라도 원하는 것 하나만 이룬다면 그 여행은 '성공한 여행'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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