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차의 종착역은 행신역입니다
서울로 가는 KTX를 타다 보면 대부분 서울역이 종착역이지만, 가끔 행신역에서 멈출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살짝 불편함을 느끼곤 합니다. 종착역이 서울역이라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마음 편히 쉴 수 있지만, 행신역에 내릴 때는 도착을 신경 쓰게 되니까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 일부는 '왜 갑자기 행신역 이야기를 꺼내지? 분명 용산국제업무지구 이야기를 하려던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행신역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현재 용산국제업무지구로 지정된 부지가 원래 용산정비창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과거 철도차량의 정비창 역할을 했던 곳이죠.
오른쪽 사진을 보시면, 철거되기 전의 용산정비창(용산철도공장)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는 철거가 모두 완료된 상태인데요. 그렇다면 철도가 사라진 것은 아닐 텐데, 철도차량 정비는 어디서 이루어질까요? 지금은 고양시, 즉 행신역 인근으로 철도차량 정비 기능이 모두 이전되었습니다.
이번 글을 준비하면서 저도 이런 배경을 알게 되어 흥미로웠습니다. 용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행신역 이야기도 나오게 된 것이죠. 이제 본격적으로 돌아가 용산국제업무지구와 그 역사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용산정비창의 역사는 일제강점기 한일의정서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이 조약을 근거로 용산 일대 약 300만 평을 군용지로 강제 수용하였고, 이곳에 철도와 군사 시설을 집중적으로 건설했습니다. 1907년에는 일본의 철도국이 인천에서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용산은 철도 관련 시설들이 모여드는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1920년대에 접어들며 용산철도공장(혹은 경성공장)이라 불리던 이곳은 증기기관차와 객차 등을 본격적으로 제작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철도시설이었던 용산철도공장은 약 26만 평방미터의 부지와 4만 5천 평방미터의 건물, 850여 개의 기계를 보유한 거대한 시설이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증기기관차와 객차, 화물차 등 다양한 차량의 제작과 유지보수가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이곳은 일본의 군사적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대형 증기기관차와 다양한 철도 차량을 생산하는 데 집중했으며, 철도학교, 철도병원, 철도관사와 같은 부대시설도 함께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시설들이 함께 형성되면서 용산은 자연스럽게 '철도 클러스터'로 자리 잡게 되었고, 한반도 철도 산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할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1917년 12월 20일 자 매일신보 기사에는 용산철도공장에서 제작된 최초의 일등 객차에 대한 소식이 실려 있습니다. 이 객차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일등석 전용 객차로, 최신식 설비가 갖춰진 고급 객차였습니다. 남대문역 객차고에 배치된 이 객차는 한 대당 약 2만 7천 원이라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으며, 이는 당시 용산철도공장의 기술력과 생산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처음 제작한 일등차] 용산역 철도공장에서 제작하던 일등객차 두 개가 이 즈음 완성되었음으로 남대문역의 객차고간에 넣어 두었다 하니, 이것은 일등차와 이등차를 한데 붙여서 만든 것이 아니오, 오로지 일등석으로 만들어서 일등의 단독 사용으로 쓸 것인데, 조선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것이라 하며, 그 비용은 한 개에 약 이만칠천 원이 들었고, 설비 기타는 최신식이라더라.
이처럼 용산정비창과 철도공장은 일제강점기 당시 한반도 철도산업의 중심지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철도망의 발전을 이끌어 나갔습니다.
광복 후 용산철도공장은 한국 철도정의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963년 철도청 서울공작창에서 1996년 서울철도차량정비본부로 개편되었죠. 이곳은 해방 후 한국 철도산업의 발전과 함께 철도 차량 유지보수의 핵심 기지로 기능하기 시작했습니다. 용산정비창은 전기기관차, 디젤기관차, 객차 등 다양한 철도차량의 정비와 수리를 맡으며, 서울을 비롯한 전국 철도망의 유지보수를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용산정비창은 한국 철도 산업의 성장과 함께 점차 그 기능이 확대되었습니다. 철도 차량의 종류와 수요가 증가하면서 정비시설과 장비가 확충되었고, 다양한 철도 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및 훈련 프로그램도 운영되었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서울의 급격한 도시화와 용산 지역의 도심화 압력이 증가하면서, 도심 한가운데 대규모 정비 시설을 유지하는 것이 점차 어려워 졌습니다. 이에 따라 일부 정비 기능을 이전하거나 시설을 재배치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습니다.
1977년, 정부는 수도권 교통난 해소를 위한 수도권 전철화 세부 계획을 확정하였습니다. 이 계획에 따라 용산-청량리-성북 구간의 화물 전용 전철선을 여객 운송이 가능한 노선으로 계량하고, 7개의 여객선을 신설하여 전동차를 운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용산~수색 구간의 단선 일반 철도를 복선 전철로 확장하고, 중간역을 신설하여 수도권 전철망을 확충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교통망 확충과 도시 개발 계획으로 인해 용산정비창의 역할과 위치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용산정비창의 위치를 이전하고, 그곳에 새로운 개발을 하자는 의견이 국가적 논의로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용산정비창의 이전과 부지 개발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습니다. 2001년 용산정비창(서울철도차량정비창) 이전사업 예비타당성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의견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철도청은 이전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부서별로 다양한 견해를 보였습니다.
차량운영담당부서: 철도 발전과 효율성 향상을 위해 시설 이전과 현대화가 필수적
차량기지 건설담당부서: 지방자치단체와 이전 대상 지역주민들의 강한 반대에 직면할 것을 우려하여 이전에 소극적인 태도
역세권 개발 담당 부서: 철도 운영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을 전제로, 부지 개발을 통한 철도청의 경영 개선 필요성을 강조
정비창 종사자들: 이전으로 인한 통근 거리 증가와 생활상의 불편에 대한 보상책 마련을 요구
서울시는 도시 기능 확충과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 용산정비창 부지의 재개발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이전의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반면에 이전 대상 지방자치단체들은 대규모 철도 정비 시설이 이전되어 올 경우 환경 문제와 지역 발전 저해를 우려하여 반대 입장 제시했죠.
이처럼 용산정비창 재개발 필요성은 공감되었지만, 정비공장의 이전은 후보지로 거론되는 지역마다 주민들의 반대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2003년, 여러 차례의 협의 끝에 고양시로 이전이 결정되었고, 그곳에 정비창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2006년 용산차량사업소가 고양으로 통합되며 수도권철도차량관리단으로 개편되었습니다. 그해 철도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용산역세권개발 등 다양한 대책을 수립했습니다. 2010년 도시개발구역지정 및 개발계획수립 고시가 되었고, 2011년 사업시행자 지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2013년 사업시행자인 드림허브가 디폴트(채무불이행)를 발생시켰고, 그해에 코레일과 드림허브는 사업협약이 해제됩니다. 서울시는 2013년 10월 10일 사업시행자 지정취소 및 도시개발구역 지정 해제하였습니다.
사업무산과 관련해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업시행자인 드림허브프로젝트금융투자주식회사는 코레일을 비롯한 다수의 민간 기업이 참여한 특수목적법인입니다. 2013년 3월 12일 드림허브가 자금 조달에 실패하여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코레일은 사업 정상화를 방안을 발표했지만, 사업시행자 이사회에서 해당 방안이 부결되었습니다. 코레일은 드림허브에 지급했던 토지 대금을 순차적으로 반환받았고, 총 3차에 걸쳐 약 2조 3,167억의 토지 대금을 회수하였습니다. 서울보증보험을 통해 협약 이행 보증금 2,400억 원을 회수하여, 사업 무산에 따른 재정적 손실을 일부 보전했습니다.
당시 드림허브는 왜 자금조달을 하지 못했을까요. 거시적인 이유와 미시적인 이유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코레일이 출범될 때 부채(4조 5000억)와 용산역 정비창 부지가 함께 이전됐습니다. 용산역 개발이 논의되던 2005년~2007년 당시만 해도 국제 경제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2008년 하반기에 리만브라더스 파산의 여파로 2009년 국내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어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부동산 개발에 대한 투자 심리가 위축되어 대규모 자금 조달이 어려워졌습니다.
미시적인 이유로는 사업 주체 간 갈등이 있었습니다. 첫 갈등은 서부이촌동을 포함해 개발하는 것에 대한 의견차이였습니다. 서울시-사업주체-서부이촌동주민 이렇게 삼자 간의 갈등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서울시가 입장을 서부이촌동은 분리개발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꿨는데, 그 과정에서도 삼자 갈등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자금 조달 실패는 이런 거시적 경제 상황과 미시적 내부 문제의 복합적인 결과였습니다. 드림허브는 해외 자본 유치를 위해 노력했지만, 착공 승인 지연과 불확실한 사업 여건으로 인해 투자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그리하여 드림허브는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2013년 사업이 무산된 이후에도, 대규모 소송 전과 다양한 개발논의가 있었습니다. 다시 본격화된 건 2022년. 오세훈 시장이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구상을 발표하며 재추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면서부터입니다. 2010년대에 제시했던 토지이용계획과 큰 차이점은 서부이촌동을 과감하게 제외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업시행자도 민관협동방식이 아니라는 게 특징입니다.
용산국제업무지구가 원활히 진행되기 위해서는 토지의 확보가 필요합니다. 관련자료를 찾아봤으나, 미확보된 토지가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용산국제업무지구 주민설명회와 위성자료로 관련된 내용을 추측해 보려고 합니다.
토지이음에서 토지이용거래허가구역만 레이어를 씌워 봤습니다. 해당계획에 포함된 곳이 대부분 철도부지로 코레일이 소유한 땅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1번이라고 파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용산국제업무지구에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실시계획인가 단계에서 해당 도로(광로 3류)가 포함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추측한 이유는 "개발계획상 6차선이 들어서야 하기 때문에 불가피하다"라는 언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야를 불문하고 용산국제업무지구에 재개발에 대한 관심은 계속 가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도시계획학도로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조감도를 보면 천로를 전부 녹지화를 할 계획인 거 같은데, 이 조감도는 일부 잘못된 것 같습니다. 용산철도 지하화까지는 이해되지만 전부 보행로로 바꾸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니까요.
추측하건대 보도체계도를 봤을 때는 서부이촌동-한강까지 걷는 길을 일부 만들고, 철도는 지하화하고 다시 하늘에 있는 선로로 나오는 형태로 실제설계에 반영될 것 같습니다.
도시인사이트의 감상
용산국제업무지구가 엎어질 시점. 저는 대학생이었습니다. 서부이촌동에 있는 작은 학원에서 아르바이트 하던 20대 그시절, 11년 전 서부이촌동은 신기했습니다. 역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워서 2016번 버스를 타고 다녔어야 했거든요. 서부이촌동은 분명 서울이고 서울의 중심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통접근이 어렵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먹을 만한 식당이 없기도 했고요. 현재, 개발로 인해 서부이촌동이 슬럼화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교통성 확보와 인프라 확충이라는 측면 해서는 반사이익도 어느 정도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때 서부이촌동 아파트를 샀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