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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연필 Aug 18. 2016

숫자, 그 안에 갇힌 우리들

수치적 평가에 대하여

어른들의 이야기 맥락을 간신이 이해할 수 있었던 어린 시절. 유치원에서 배운 숫자를 1부터 100까지 소리 내어 말하면서 방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정신없으니 가만히 앉아서 세라는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심심함과 조용함이 무언가를 하고 싶던 그때의 나에겐 며칠간은 숫자를 세는 것이 하나의 놀이가 되었다. 대부분 100까지만 세고 그 이상은 재미없는 반복이라고 생각했고, 다시 1부터 세곤 했다. 그러다 보니 100은 나에게 가장 큰 수가 되었다. 나를 떠나 대부분의 주변 친구들도 100이란 숫자는 '많다'라는 말을 대변해주곤 했다.


숫자를 세는 놀이는 집 안방에서 지하철역으로 옮겨 갔다. 유치원에서 내리막길로 쭉 내려가면, 금호역이 있었고 역 안의 네모난 타일들이 장난감이 되었다. 손가락 끝을 벽에 대고, 한쪽 벽이 끝날 때까지 걸어갔다. 타일 사이에 홈으로 손가락이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그 느낌이, 나에게는 재밌는 숫자 세기 놀이였다. 그렇게 몇 번 왔다 갔다 하면 손 끝이 검게 변했고, 집에선 엄마의 따끔 한 손과 꾸중이 기다리고 있었다.


숫자 세기가 재밌는 놀이에서 두려운 그림으로 변한 건 유치원 첫 받아쓰기였다. 받아쓰기 점수라는 숫자가 다른 친구들보다 낮았고, 그날 저녁 부모님에겐 평소 유치원 선생님의 교육을 집중하지 않은 것이라 증명이 되었다. 당연히 혼이 났고, 나도 화가 났다. 나는 수업이 어려웠다. 그래서 점수가 낮았다.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았지만, 손들 수 있는 용기는 전혀 없었다. 손을 들고 질문하면 친구들이 나를 보는 것이 그렇게 부끄러웠다. 계속 수업은 더 어려워졌다. 그렇게 내 숫자는 올라가지 않았다.






숫자의 발전은 인류에게 많은 것을 선물했다. 모든 산업에서 숫자가 사용되고, 우리의 일상에서도 숫자는 항상 곁에 있다. 숫자가 우리에게 주는 이점에 대해 많은 이들이 증명했으며 지금도 실현되고 있다. 1986년까지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63 빌딩은 그냥 높은 건물이 되었다.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타이틀은 더 정교하고 완벽한 계산과 설계로, 매번 각 나라에서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건축뿐 아니라 모든 산업에서의 발전은 숫자들이 그 업적을 도와주고 있다.


우린, 숫자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모든 평가는 수치로 구분된다. 수치가 아닌 평가는 '주관적'이라는 좁은 의미로만 참고하고, 정확한 평가의 기준은 수치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래야 인정해주는 세상에 살고 있다.



수치적 평가가 가져오는 이점은 지휘체계 및 통계적 상황에서 큰 효율을 보여준다. 과거의 이력, 현재의 상황 판단 및 미래예측까지 가능하다. 이런 능력을 지닌 숫자에게 고마워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가 않다. 


숫자가 주는 것은 단순한 '자료'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자료를 토대로 하여 가공하면 '정보'가 되는 것인데, 이것이 산업적인 부분을 떠나 한 개인을 대상으로 했을 때도, 올바른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한 개인의 삶에 있어서 숫자는, 생각보다 불청객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이 수치적으로 평가되는 것은, 실로 비인간적이라고 표현할 만큼 잔인한 평가라는 것을 우리는 아직 모르고 있다. 단지 일상에서 자신도 모르게 받는 스트레스로 그 힌트를 얻을 뿐이다. 숫자가 더 이상 무엇을 세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이룰 수 있는 기준치로 변해버린 지 오래다. 누군가가 나에게 준 무엇이, 높은 수치의 무엇이라면 기분이 좋고. 다른 이들보다 낮은 수치의 무엇이라면 기분이 별로가 돼버리는 지금.

우리는 기계들과 같은 선상에 놓여있음을 의심할 필요가 있다.


결과만을 바라는 세상에서 과정을 보려는 노력을 해볼 필요가 있다. 그 과정을 보는 습관을 갖게 된다면, 절대 수치적 자료에서 얻을 수 없는 한 사람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마음의 눈이라 불리는 또 다른 눈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다.


한 사람의 가치는 숫자로 표현하기엔 속임수도 오해도 많다. 

우린 숫자에 너무 기대고 있고, 너무 의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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