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시간

by B급 인생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는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시 사이에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 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 해 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 시간이 남아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

(도종환의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가 어느새 50대 후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내가 이렇게 금방 중년이 될 줄 몰랐다. 이제 몇 해 지나면 정년퇴직이다. 인생 2막의 시작이다. 지난 삶을 돌아보면, 남들보다 별나게 잘 살아온 것도 없지만 특별히 잘못이다 싶은 것도 없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아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젊은 날 다른 길로 가보았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 적도 있다. 인생을 걸고 뭔가를 해봤으면 어땠을까 그려보기도 했다.


보통의 남자라면 아내를 만나서 아이들이 태어나 내 가정이라는 것이 생기면 소심해 지기 마련이다. 나도 그랬다. 살다가 두 갈래 길을 만나면 언제나 망설임 없이 안전하고 조용한 길을 택했다. 그러니 어찌 아쉬움 없는 삶이라고 자신할 수 있겠나?


누군가 그랬다. 인생 2막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라고. 내 인생에도 곧 가을이 닥칠 것이고 겨울도 빠른 속도로 달려올 것이다. 도종환 시인의 말처럼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 번은 허락하시리라” 믿는다. 하지만 나는 내 지난 삶에 아쉬움은 들지언정 후회하거나 되돌아 가고 싶지는 않다. 나름대로 주어진 삶을 치열하게 살아냈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하루를 얼마나 사랑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내 아내와 아이들이 증거해 줄 것이다.


살아오면서 자랑하고 싶었던 일도, 감추고 싶었던 일도, 모두 지난 시절을 수놓은 삶의 편린들이다. 현재의 내가 있기까지 나를 형성하는 토대이자 통과의례이기도 하다. 그러니 남길 것만 남겨두고 지울 것은 지워야 할 애증의 잔재라기보다는 그 모두가 그리움의 대상이지 않겠나? 내 인생 2막은 지난 삶과 아주 동떨어진 별세계는 아니리라. 다만, 바삐 사느라 생길 수밖에 없었던 지난 삶의 빈 틈을 꼼꼼히 메우면서 조금 천천히 살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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