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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인생 Sep 16. 2020

일개미의 비애

 개미는 근면성의 대명사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이 관념이 굳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근래에 들어 이 우화의 패러디들이 넘쳐난다. 내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여러 개다. 하지만 대부분 개미의 불행한 결말을 묘사하고 있다. ‘워라밸’이라는 시대적 화두가 반영된 현상이다.


 몸을 혹사시키며 열심히 일한 결과, 개미는 몸져누웠고 베짱이는 자신이 연주한 음악으로 음반을 내어 대박이 났다는 이야기는 이제 익숙하다. 더 진화된 버전이 있다. 착취당한 개미가 누적된 과로로 입원했는데, 치료비가 부족해서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그때 빌보드 차트를 정복한 베짱이가 스케줄 펑크까지 내면서 찾아와 개미의 치료비를 대신 내고 병실을 지켰다고 한다. 무턱대고 열심히 일만 하다가 이용당한 개미와 자기 능력을 제대로 계발한 베짱이를 역설적으로 풍자했다. 더 극단적인 버전에서는 개미가 과로사하기도 한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개미는 겨울에도 일해야 하고 베짱이는 더 놀게 되었다는 환경문제 차원의 패러디도 있다.


 어느 패러디라도 개미가 열심히 일한다는 사실에 이의가 없다. 그런데 ‘일개미의 법칙’에 따르면, 현실에선 일개미라고 모두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어느 학자가 일개미 집단을 관찰하니 그중 20퍼센트만 부지런히 일했다고 한다. 60퍼센트는 마지못해 일하는 부류이며, 나머지 20퍼센트는 아예 일을 하지 않는 농땡이 개미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개미사회는 큰 탈 없이 유지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다음에 부지런한 일개미만 따로 모아 보았더니, 부지런한 개미, 마지못해 일하는 개미, 농땡이 개미의 비율이 다시 20:60:20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농땡이 개미만 따로 모아도 똑같은 비율을 보여주더라는 것이다. 그게 개미사회의 생존법칙이라고 한다.


 A는 신입사원 때부터 돋보였다. 일머리가 있어서 어떤 임무를 맡겨도 척척 해냈다. 게다가 부지런해서 스스로 일을 찾아 처리하기도 했다. 근무 연수가 늘어날수록 입소문을 타고 그녀를 원하는 부서가 많아졌다. 심지어 회사에서 태스크 포스를 만들 때면 영입 영순위였다. 자신을 인정해주는 회사에 보답하듯 그녀는 일개미처럼 일했다. 그 결과 입사동기들에 비해 승진도 빨랐다.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일에 빠져 살았다. 언제나 움직이고 있었고 잠도 자지 않는 듯했다. 힘든 일, 남이 꺼리는 일도 도맡아 했다. 그녀의 세포에는 분명히 일개미 DNA가 장착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A가 입사했을 무렵에 만난 상사다. 껍질을 깨고 나온 병아리가 가장 먼저 보는 존재를 어미처럼 따르듯, 그녀는 20년이 더 지나도록 나를 많이 따른다. 이제 맹렬 여전사가 되어 회사 안팎을 휘젓고 다니지만, 그래도 종종 짬을 내어 사내 메신저로 나와 속 깊은 대화를 나눈다.


 “저는 휴일에 집에만 있으면 불안해요. 차라리 출근해서 일하는 게 마음 편하더라고요. 가끔은 일할 때 행복감이 밀려와요”


 이런 대화를 할 때면 나는 마음이 아프다. 그녀는 우리 사회에서 끈질기게 작동하고 있는 학연, 지연, 혈연에 대해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여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여전하다고 불평하곤 했다. 오로지 일로 승부하는 것만이 우리 조직에서 살아남는 길이라 판단한 듯했다. 언제부턴가는 그게 지나쳐 일 자체에 빠져 있었다. 마치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에 중독된 마라톤 ‘덕후’ 같았다. 회사에서 그녀를 배려해 좀 쉬라고 보내준 연수를 중도 포기하고 복귀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능력이 필요했던 어느 상사가 부추긴 게 분명했다. 나는 그 상사의 이기심보다 그녀의 일 욕심이 더 안타까웠다. 내가 그에 대해 책망하자 몹시 서운했던 모양이다. 오랫동안 메신저에 쪽지 한 장 없었다.


 A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가 떠오른다. 이제 세상은 ‘통제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전에는 타인에게 ‘하지 말라’고 간섭하는 통제사회였는데, 요즘은 반대로 뭐든지 ‘잘할 수 있다’고 부추기는 ‘과잉 긍정 사회’라는 것이다. 한 때 ‘Yes l can’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자신을 스스로 채찍질하게 만드는 시대다. 일중독 현상이 만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단 A만의 현상도 아니다. 우리 개미굴의 일개미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거의 매일 야근하고 수시로 휴일 근무도 한다. 회사는 달성해야 할 목표만 제시할 뿐,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다만 연말에 성과를 평가하고 그것을 승진과 급여에 반영시킨다. 그래선지 시간을 쪼개어 사는 데도 늘 바쁘고 정신이 없다. 휴가나 휴일이라고 해도 머리에는 일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휴식은 휴식이 아니라 일의 연장선에 불과하다.


 A는 우리 조직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하려 애쓰고 있다. 그 이면에는 언젠가 조직으로부터 소외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는 듯하다. 그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 하더라도 나는 A가 가끔은 베짱이 같은 농땡이 개미였으면 좋겠다. 좀 쉬었다가 다시 부지런한 일개미로 돌아가면 될 일 아닌가? 조금만 쉬어가면 더 많은 것이 보이는데 말이다. ‘일개미의 법칙’에서도 모든 일개미가 부지런히 일한다면 어느 순간 에너지가 동시에 소진되어 그 집단은 절멸한다고 주장한다. 개인으로 보나 조직으로 보나 일중독은 득 보다 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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