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황야의 이리>를 이렇게 읽었다.
내 안의 다중인격자
몇 페이지를 읽다가 이게 아니다 싶으면 과감히 책을 덮는 게 나의 독서행태다.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책을 아무 의미 없이 꾸역꾸역 읽느라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다.
"이 사내는 사교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처럼 끔찍이 사교성이 없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는 정말이지 한 마리 <황야의 이리>였다. 낯설고 거칠고 그러면서도 수줍어하는, 그것도 몹시 수줍어하는 존재,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였다."
이 구절에 꽂혔다. 꼭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쉽게 이해되진 않았지만 끝까지 읽어보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지독하게 내성적인 성격 탓에 학창 시절부터 친구 한 명 제대로 사귀지 못했다. 지금까지 가끔 소식을 주고받는 친구들이라고 해봐야 다섯 손가락도 꼽을 수 없을 정도다. 그들조차 내가 먼저 접근했다기 보다도 우연한 기회에 가까워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컨대 학창 시절 짝꿍이었다던가 귀가 방향이 같았던 이유에서였다.
어쩌면 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황야의 이리>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면에 있어서는 끊임없이 바깥 세계에 융화하고 그 속으로 들어가고자 노력했다. 그게 살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하리 할러처럼.
"<황야의 이리>는 가정생활이나 사회적인 명예욕에 관심이 없었던 까닭에, 그 자신의 견해에 따르자면, 전적으로 시민적인 세계의 밖에 있었다. 그는 자신을 철두철미 독립적인 인간이라고 느꼈다.
(...)
그렇긴 해도 그는 여러 면에서
아주 시민적인 생활을 했다. 은행에 예금을 했고, 가난한 친척을 도와주었으며, 옷 입는 데 별 신경을
쓰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사람들 눈에 튀지 않게 단정하게 입고 다녔고, 경찰, 세무원 같은 공권력과는 가능한 한 마찰 없이 지내려고 애썼다."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는 소설이라기보다 마치 인간의 내면세계를 관찰하는 철학책 같았다. 읽어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신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듯 읽어가야, 그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을 듯하다.
"우리 <황야의 이리>는 감정에 있어-복합적인 존재가 다 그렇듯이-때론 이리로 때론 인간으로 살았지만, 그가 이리일 때는 그의 내면에 있는 인간이 항상 바라보고 판단하고 조종하면서 잠복해 있었고, 그가 인간일 때에는 이리가 똑같이 그런 짓을 했다."
이 처럼 우리 내면에 잠재된 인격의 이중성을 다룬다. 인간은 누구나 이런 기질도 있고 저런 기질도 있다. 밖으로 보이는 성향은 어느 기질이 더 강한가라는 상대적 개념이다. 나의 내성적 성격이 보통 사람에 비추어 그럴 뿐, 외향적 기질이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때에 따라 혹은 누구와 관계냐에 따라 얼마든지 외향적 성격이 발현된다. 그래서 헤세는 인격의 이중성을 갈등관계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 조화롭게 융화하라고 충고한다. 이중성을 넘어서라 한다. 니체가 초인(Übermensch )이 되라는 주문만큼이나 어렵다.
"<황야의 이리>도 하나의 허구이다. 하리가 자신을 이리 인간으로 느끼고, 두 개의 적대적이고 대립적인 존재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단순히 신화에 불과하다. 하리는 이리 인간이 아니다. 그 자신이 꾸며내고 또 믿고 있는 거짓말을 우리가 자세히 검토해 보지도 않은 채 받아들여서, 그를 사실상 이중적 존재인 <황야의 이리>로 고찰하고 해석한 것은 좀 더 쉽게 이해시키려는 마음에서 하나의 속임수를 이용한 것이다. 이제 이 속임수를 바로잡아야겠다."
오히려 인간 내면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하리는 두 개의 존재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수백수천의 존재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삶은 이를테면 본능과 정신 같은 두 개의 극단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수천의, 무수한 쌍의 극단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다."
이 다양성을 어떻게 조합하고 융화하여 발현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향로가 달라진다고 본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여러 개의 자신만의 특징적인 장기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천 가지, 만 가지의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 파블로가 지적했듯이 하리할러는 그 장기말을 다루는 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나도 아직 그것에 익숙하지 못하다. 그래서 이것이 아니다 싶으며 엎고 또다시 말을 둔다. 그리고 그것도 아니다 싶으면 다시 쓸어엎는다. 그러기를 반복하고 있다."
우리 속에 있는 인격의 다중성, 이게 잘못 발현되면 정신분열일 수도 있다. 하지만 헤세는 이 다중성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색깔이 달라진다고 본다. 그래서 이 소설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라는 유희의 수십만 개의 장기말이 모두 내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
언젠가는 장기말 놀이를 더 잘할 수 있겠지. 언젠가는 웃음을 배우게 되겠지."
사춘기 시절부터 나는 내 성격이 너무 싫었다. 내면으로만 파고드는 기질이 강해서 포기했었던 일들이 많았다. 내 안의 다른 많은 기질들을 끄집어내지 못한 채 살아왔다. 내 운명이니 하고 살아왔다.
막내딸이 날 닮은 듯하다. 하고 싶어도 밖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일들이 많다. 딸의 주머니에 있는 다른 많은 장기말들을 조화롭게 다루게 할 묘안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