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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인생 Feb 09. 2022

진흙 속의 거북이

삶의 자유

  <장자>에 이런  일화가 실려있다. 중국 요순시대의 요임금이 나이가 들어 나라를 다스리기 힘들었다. 아들이 있었지만, 왕이 되기에는 자질이 부족하다 보고 백방으로 훌륭한 인물을 찾았다. 그러던 중 초야에 숨어 사는 은자, 허유가 대단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요임금은 그를 찾아가 자신의 왕위를 대신 맡아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가관이다.


  “이미 천하를 잘 다스리고 있는데 내가 대신한다면 나더러 허울 좋은 이름만을 얻으란 말 아니오? 뱁새가 깊은 숲에 둥지를 튼다 해도 나뭇가지 하나면 충분하고, 두더지가 황하의 물을 마신다고 해도 배 채울 정도면 그만이오. 그러니 돌아가시오. 나에게는 천하가 쓸모없소.”


  그 후에도 요임금이 다시 찾아가 작은 자리라도 맡아달라 부탁했지만 허유는 단호했다. 청을 거절한 는 자신의 귀가 더럽혀졌다며 영천이라는 냇물에 가서 귀를 씻었다고 한다. 또 한 사람의 은자 소부라는 이가 소에게 물을 먹이러 왔다가 허유를 보고는 왜 귀를 씻고 있는지 물었다. 한데, 허유가 자초지종을 들려주자 소부는 핀잔을 주며 한술 더 뜬다.


  “당신이 은자라는 소문이 널리 퍼졌으니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아니오. 진정한 은자라면 그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야 하는데, 당신은 자신이 은자라는 것을 퍼뜨려 명성을 얻은 것이 아니오?”


  그리고는 허유가 귀를 씻어 더럽혀진 물을 소에게 먹일 수는 없다며 상류로 데려가 물을 먹였다고 한다.


  요즘의 기준으로 보면 터무니없고 비현실적인 얘기지만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삶의 모습이다.




  서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로 인해 온 나라가 야단법석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이 내말을 듣노라면 과연 나라와 국민을 위해 출마했는지 진정성 의심이 든다. 하나같이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저 듣기 좋은 소리나 경쟁적으로 해대듯하다. 윤리적 잣대로나 리더십의 기준으로나, 아니면 사람 됨됨이를 보더라도 썩 마음에 드는 인물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뿐일까. 오죽하면 이번 선거는 괜찮은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하자가 덜한 사람을 뽑는 것이라고 할까. 그만큼 비호감 투성이의 후보자뿐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대통령이 되어 국정을 이끌고 갈 터이니 참으로 불행한 시대다.


  나는 한 나라의 통수권자라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헌신적인 사람이 맡아야 한다고 철석같이 믿어왔다. 그만큼 매 순간이 힘들고 골치 아픈 자리다. 내 삶의 기준으로 볼 때 그런 고달픈 자리를 왜 차지하려고 난리들인지 이해가 안 된다. 지금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보면 아무 걱정 없이 한평생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인데, 굳이 힘들 일을 하려 뛰어드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나는 직장에 있을 때 고작 중간관리자까지 밖에 올라가지 못한 릇이라서 그들의 포부와 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보잘것없는 그 자리에서 일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벅찬 나날이었기 때문이다. 외부기관 사람을 상대하는 일, 민원인을 달래는 일 때문에 아니꼽지만 늘 저자세로 굽신거려야 했다. 부서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려 아래와 윗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아야 했다. 혹시 투서나 모함으로 날 힘들게 하지 않을까 조바심 내며 관련 업체들을 상대해야 했다. 난처했지만 결례가 될까 봐 차마 면전에서 거절 못했던 선배들의 부탁도 많았다.


  능력과 분수가 모자니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이렇듯 이런저런 근심과 걱정거리로 늘 뒤통수가 무거웠다. 한마디로 그 생활을 언제쯤이나 벗어날 수 있을까 애태운 세월이었다. 현업에 있던 30년 넘는 세월 동안 나는 늘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처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자유로운 삶을 갈망할 수밖에 없었다.


  변호사나 검사, 의사와 IT업계 CEO 같은 삐까번쩍하 직업을 가졌던 출마자들 편하게 먹고살자면 대통령이 아니라도 충분하다. 그런데도 뭐가 아쉬워 스스로 고난의 길로 들어서려는 지 알 수가 없다.  보기엔 특별히 자신이 시대적 사명을 타고났다거나 국민적 요구에 부응해서 나섰다고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다. 그게 권력의지라는 것일까.




  나는 <장자>에 나오는 또 다른 이야기 읽노라면, 권력과 명예욕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가소로운 행태를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초나라 왕이 낚시로 소일하던 장자에게 사람을 보내어 관직을 주겠다는 뜻을 전했다.


  "부디 나라 일을 맡아 주십시오"


  장자는 낚싯대를 잡은 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초나라에는 영험한 거북이 있고 죽은 지 3천 년이 되었지만, 왕이 보에 싸서 상자에 넣어 종묘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소. 한데, 이 거북은 죽은 뒤에 뼈만 남아 존숭 되기를 바랐겠소, 아니면 살아 남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있기를 바랐겠소"


  왕명을  전하러 온 사람이 대답했다.


  "그야 오히려 살아서 진흙 속에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 테죠"


  장자는 말했다.


  "가시오. 나는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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