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급 인생 Mar 08. 2022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몇 달 전부터 눈이 침침해졌다. 고도근시에다 노안이 겹쳐진 지 오래되었지만 책 읽고 글 쓰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그런 눈이 근자에 와서 책을 보면 흐릿해져 읽을 때도 불편해지고 글을 쓸 때도 아예 안경을 벗는 게 편하다. 나이가 들면 찾아온다는 백내장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해서 올해 건강검진은 예년보다 몇 개월 앞당겨 받았다. 망막 성이 의심된다고 했다. 안과 전문병원을 찾아 정밀검진을 받았는데 고도근시로 인한 현상일 뿐 이상은 없다고 했다. 일상생활에 큰 불편 없는데 자잘한 글씨를 봐야 할 때면 몹시 답답하다.


취미라고 할 만한 게 없는 나로선 대개 여유시간을 독서에 많이 할애하는데, 눈이 이 지경이니 안타깝다. 글자를 읽다 보면 따끔거리고 쉬 피로해져 30분 이상을 읽기 힘들다. 읽는 동안에는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느라 산만해져서 오롯이 집중이 되질 않는다. 어떤 때는 머리까지 지끈거려 눈의 피로가 두통으로 연결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차츰 책 읽는 게 번거로워져 재미가 없고 책을 읽어 뭣에 쓰나 의구심도 자꾸 든다.


이젠 눈을 많이 쓰지 말라고 하늘이 경고하는 듯싶기도 하다. 참 서운하다. 정년퇴직도 아직 몇 년 남았고 환갑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이 모양이 된 눈 때문에 황금 같은 시기를 쓸모없이 흘려보내란 말인가. 나는 노후에도 책을 많이 읽고 글도 자주 쓰고 싶다. 그러니 이렇다 할 취미도 없는 내가 뭘 하며 노년을 보내야 할지 막막하다.


아내에게 말더니 이제 눈을 사용하는 일은 하 말라고 했다. 일뿐만 아니라 취미 생활도 눈을 자극하는 쪽은 피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악기 연주나 운동 쪽으로 많이 할애해야 할 듯하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눈을 쓰지 않고 뭘 할 수 있을까. 악보를 보고 기본적인 책도 봐야 하고, 배운 바를 잊지 않으려면 메모 할 텐데 말이다. PC나 스마트폰을 자주 들여다봐야 하니 그것도 내 약한 눈에는 큰 골칫거리다. 안 보는 게 상책인데 문명의 이기를 멀리하 어려운 시대다. 뉴스도 봐야 하고 문자나 메시지도 주고받아야 하니 피할 순 없다.




작년까지 꼭 하고 싶었던 자격증 공부를 느라 미뤘던 독서를 올해는 맘껏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눈 상태가 시원찮아지니 복병을 만난 셈이다. 백 년도 안 되는 인생길에 뭐 하나 쉬운 게 없다는 걸 새삼 느낀다. 책 읽기를 멀리하다 보니 이것저것 시답잖은 일로 하루가 메워진다. 그 생활이 반복되니 나태함과 권태감, 무기력도 한꺼번에 밀려온다. 하루가 하릴없이 흐르다가 창문으로 석양이 비칠 때면 '오늘도 이렇게 가고 마는구나'하며 회한에 젖어든다. 이러지 말아야겠다고 아침마다 다짐하지만 막상 하루를 시작하면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된다. 눈이 가장 큰 원인이지만 전반적인 신체의 노화가 모든 것을 느리게 하고 바닥으로 침잠시킨다.


나에게도 세월은 가고 또 오는 것이지만 아직 젊다는 오기가 끓어 망연히 흘려보내고 싶진 않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이 지나가는 속도도 빨라지는 것만 같아 마음이 다급해진다. 아직 뭐라도 해보다가 늙음을 받아들이고 싶은 데, 몸이 먼저 늙어가니 마음도 금방 뒤따라 가게 되지 않을까 애가 탄다. 이럴 줄 알았다면 젊은 시절 좀 더 공부하고 좀 더 열심히 해둘걸 그랬다. 나중에 여유가 생길 때 하지 하며 미뤘던 게 후회된다. 이걸 해서 뭣에 쓸까 가볍게 여기며 살아서 아쉽다. 돈이 많이 들어 내형편에 어울리지 않다며 포기했던 때도 자꾸 돌아보게 된다. 버나드 쇼의 유명한 비문도 아마 지금 나 같은 심정에서 만들었지 싶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언젠가 TV 강연 중에 "위대한 유치함"이란 말이 마음에 꽂혔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정도 아닐까 해석해 본다. 동기는 유치하고 보잘것이 없지만, 시작해서 하다 보면 빠져들게 되고 그 과정에서 열정이 더해져 애초와는 달리 자신도 모르게 대단한 결실을 거둘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지난 시절의 많은 일들을 돌이켜보면 썩 공감을 할 수 있는 말이다.


뭔가 하고 싶으면 이유 불문하고 일단 저질러야 한다. 망설이다 시도조차 못하거나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게 되면 나중에 후회하는 맘이 꼭 찾아온다. "그때 시작했으면 지금쯤 상당한 수준이 됐을 텐데"라고 누구나 한 번쯤은 후회해본 적 있을 것이다. 나도 몇 번의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그게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시작한 적이 많았다. 이 공부를 해야 하는지 회의가 찾아올 때도 있었다. 이것저것 재보면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거나 하다가 중간에 포기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고 싶다고 모든 것을 다 잘할 순 없지만, 지난 시간을 허송세월 한 듯싶고  '그동안 뭘 하며 살았을까'하며 지금 자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도 몸이 성할 때나 성립 가능한 이다. 지금의 내 눈처럼 신체의 노화로 현실의 벽이 생긴다면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 몸이 건강할 때,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맘껏 저질러야 한다. 시간이 없다고, 형편이 안된다고, 당장 써먹을 데가 없다고 미뤄두거나 포기한다면 언젠가 후회가 찾아온다. 지금 못하면 나중에도 못한다. 살다 보면 하고 싶은 의욕도 희미해진다. 무엇보다 노화가 찾아와 내 육신뿐만 아니라 마음과 정신마저도 갉아먹기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매일 먹는 영양제가 자꾸 늘어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