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인 후쿠오카 여권분실 이야기
여권분실 프롤로그
그동안 여행한 나라가 20여 개국, 나름 여행을 많이 했다면 한 베테랑인데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후쿠오카에서 벌어졌다. 평소에 물건을 자주 잃어버리지 않는 편인 데다가 후쿠오카는 옆동네처럼 자주 방문했던 익숙한 곳에서 벌어진 일이라 너무나 당황스러웠고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심장이 쿵쾅거린다.
사건의 발단
크리스마스를 한국에서 보내기 싫어 후쿠오카로 떠나왔던 그해 크리스마스 당일, 하지만 식당에서 수많은 한국인 커플들을 보며 일본인인척 혼밥을 했었던 그날 그 일은 벌어졌다.(겨울부분 참고: 후쿠오카의 봄, 여름 그리고 겨울 (brunch.co.kr)) 한국인 커플지옥(?)에서 식사를 마치고 가족들 선물을 사기 위해 텐진지역으로 향했다. 평소에 자주 가는 쇼핑몰인 미나텐진에서 몇 가지 물건을 사고 그날의 식사의 분위기가 나를 피곤하게 했는지 쇼핑몰 1층에 마련된 벤치에서 잠시 앉아 쉬었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숙소로 돌아왔는데 숙소에서 너무나 또렷하게 여권을 그 의자에 두고 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보통 물건을 잃어버리면 어디서 언제 잃어버렸는지 헷갈리는데 이때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너무나 또렷하게 여권을 두고 온 그 순간이 생각났다. 왜냐하면 선물 구매 시 면세혜택을 받기 위해 여권에 영수증을 받고 정리한다고 의자 위에 올려뒀기 때문이다(이러고선 왜 챙기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사라진 여권
여권을 의자에 두고 숙소로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데 걸린 시간은 대략 90분 정도 걸렸다. 쇼핑몰에 도착하니 거의 문을 닫는 시간이 가까웠고 일본인들은 남의 물건을 잘 안 건드린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 의자에 여권이 그대로 있기를 바라보며 찾아갔지만 의자는 너무 깨끗했다. 일단 누군가가 여권을 건드린 셈이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진정하고 경비원으로 보이는 분께 영어로 습득된 여권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모른다고만 하셨다. 여권이 사라진 벤치에서 에서 계속 맴돌다. 쇼핑몰 폐점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다시 숙소로 향했다.
크리스마스의 경찰서
일단 숙소로 왔지만 어찌해야 할지 멘붕이 왔다. 일단 호텔 카운터에 여권을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움을 요청했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근처에 경찰서가 있는데 가서 여권분실 신청서를 제출하고 여권분실 증명서를 발급받아 후쿠오카 한국 영사관에 가서 여행증명서(단수여권)를 발급받으면 안전하게 귀국(?)할 수 있다고 안내해주셨다. 여권분실 후 취해야 하는 프로세스를 정리하면
1. 근처 경찰서를 방문하여 여권분실 신고 및 여권분실 증명서 발급
2. 가까운 대사관 혹은 영사관에 방문하여 여권분실 증명서 제출 및 여행증명서(단수여권) 발급
3. 귀국하여 여권 재발급
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도미인 호텔에서(참고 : 여행의 절반은 숙소다 (brunch.co.kr)) 다행히 하카타 경찰서가 가까이에 있어 크리스마스날 그것도 해외 타지에서 경찰서를 방문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경찰서를 가니 행복한 크리스마스 때 두 명의 당직 근무자가 계셨다. 영어를 거의 못하셨는데 Passport 한 단어만 들으시고는 여권분실 신청서를 주셨다. 작성하고 드리니 증명서를 주셨고(라고 썼지만 메모지에 증명서 발급번호 같은걸 적어 주셨음) 일본어로 뭐라 하셨는데 후쿠오카돔 얘기를 하신 것으로 봐서 아마도 후쿠오카돔 근처에 한국 영상관이 있으니 그리로 찾아가라고 하신 듯했다. 어색한 메리크리스마스 인사를 남기며 경찰서를 나왔고 호텔 로비에 들어오니 호텔 직원분이 잘 다녀왔냐며 크리스마스 인사를 건네었는데 괜히 살짝 눈물이 날 뻔했다. 내 생애 가장 못 잊을 크리스마스 밤이었다.
후쿠오카 대한민국 총영사관(1 Chome-1-3 Jigyohama, Chuo Ward, Fukuoka, 810-0065 일본)
아침 일찍 조식을 먹고 영사관을 찾아갔다 참고로 대사관과 영사관의 차이는 아래와 같다.
대사관 :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를 장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이 머무는 공관
영사관 : 영사(대사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공무원)를 장으로 하는 외교사절단이 머무는 공관으로 관활 범위만 담당하는 공관
도진마치역에 내려서 후쿠오카돔 방향으로 걸어가니 영사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태극기가 보이고 한국인 직원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됐다. 여권분실 증명서를 제출하고 단수여권사진 촬영을 하고 비용을 지불하고 여행증명서(단수여권)를 발급받기까지 2시간 정도 소요됐던 것 같다. 그렇게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다시 만난 나의 여권
일단 안전하게 귀국을 할 수 있으니 마음의 여유를 찾고 후쿠오카를 산책했다. 하지만 전날 너무 많은 기운을 썼던 탓인지 별다르게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오후 3시쯤 되었을까? 영사관에서 전화가 왔다. 잃어버린 여권이 경찰서에 접수되어 찾아가라는 것이었다. 뭔가 기쁘면서도 허탈했다. 그리고 이미 단수여권이 있어서 찾을 필요가 있냐고 여쭤보니 여권을 3번 정도 잃어버리면 블랙리스트(여권을 잃어버렸다고 신고하고 브로커에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에 오를 수 있으니 가급적 잃어버린 여권을 찾아 한국에서 재발급 시 보여주면 분실 이력이 사라진다고 안내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오후 5시쯤 다시 텐진중앙공원 근처에 있는 후쿠오카 중앙경찰서로 향했다. 민원실에서 30분 넘게 대기를 하고 있다가 크리스마스날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여권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분실등록이 되어 다시 쓸 수는 없지만 막상 찾고 나서 보니 여권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던 스탬프와 비자들이 그동안 여행했던 흔적들을 찾은 감격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니 너무 허기가 져서 숙소 가는 길에 아무 라멘집을 찾아 들어갔는데 이때는 시련의 연속이 계속 이어지는지 이곳이 내가 먹은 역대 최악의 돈코츠라멘집이었다.(참고 : 일본 4대 라멘의 왕, 돈코츠라멘 (brunch.co.kr))
여권분실 에필로그
이번 일을 통해 느낀 점들이 많다.
첫 번째로 아무리 당황해도 차분하게 대처해 나가면 해결이 안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물론 처음에는 너무나 당황하고 두렵고 힘들었지만)그리고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나 영사관이 없는 지역을 방문했다면 이렇게 빠른 처리가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여권을 잃어버리고 정확히 24시간 안에 다시 찾을 수 있는 일본의 시스템과 신고정신(?)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크리스마스를 단순히 한국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 도피처처럼 찾은 후쿠오카에서의 2박 3일은 여권을 잃어버리고 다시 되찾는 에피소드로 가득 찬 잊지 못할 여행(?)이었다. 덕분에 크리스마스가 전혀 외롭지 않았고 새로운 경험과 교훈을 얻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알찬 여행이지 않을까? 그래도 다시 여권을 잃어버리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다.
셋째 날 집으로 귀국하는 날은 계속 비가 내렸지만 비행기가 이륙하니 구름 위로 맑은 하늘이 보였다. 마치 이번 여행의 과정을 보여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