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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랩 Sep 26. 2019

영화 <접속>과 한석규의 오피스텔

영화 속 장소와 현실의 도시계획

유튜브에서 영화배우 전도연의 영화 데뷔 20주년 관련 영상을 보았다. 20주년이라니, 빠르다 빨라 하면서도 <접속> 전의 TV 드라마 경력이나 CF모델 활동 시절까지 더하면 20년에 몇 년을 더 해야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전도연씨가 <접속>의 제작자인 명필름의 심재명씨, 분장을 맡았던 송종희씨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니 <접속>이 다시 보고 싶어졌다. 어딘가에서 다시 찾아서 봐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SNS에 지금 EBS에서 <접속>을 하고 있다는 글이 올라왔다.


TV를 켜 보니 한석규가 회사를 그만두고 짐을 챙기는 장면이 나왔다. 퇴사를 하는데 생각보다 짐이 많이 없군, 생각을 하다가- 그러고 보니 무슨 이민을 저리 쉽게 가지 하는 생각도 했다. 그 사이사이 한석규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셀카를 찍어 집 안 벽에 붙여 놓기도 하고 이리저리 자신의 공간을 가꾸고 있었다. 물끄러미 TV를 보는데 문득 어, 저기 어디 오피스텔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동안 궁금해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면서 화면 속 오피스텔 창 밖을 보니 세로로 '대청'이라는 레터링이 보였다.


1997년 또는 그 이전의 오피스텔이라. 거의 나산 오피스텔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아닐까. (주거형) 오피스텔 초창기라면 강남일 것이고 창 밖의 '대청'이라는 사인은 대청역 인근의 개포동 대청 아파트일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오피스텔 너머 드문드문 보이는 녹지도 개포동이라면 가능해보였다. 다음 지도를 켜서 바로 알아볼까 하다가 영화가 끝나고 줄줄이 올라가는 크레딧 끝, '장소 협찬' 라인에서 장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미씨 860 오피스텔'. 나산에서 지은 오피스텔이었다.




오피스텔은 1980년대 초반 마포의 성지빌딩을 시작으로 주거와 사무를 겸하는 공간으로 소개되었지만 당시에는 사실 상 업무시설에 더 가까운 모양새였다. 하지만 부동산 투자 열풍을 타고 이후로도 마포와 사대문 안을 중심으로 오피스텔이 계속 공급되었고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과잉공급에 투기 대상이라는 지적까지 나오게 되었다. 1990년 기사에 따르면 1989년말 기준 서울지역에서 완공된 오피스텔은 총 26개동 3,671실로 집계되었으며 이어 1991년 말에는 연내 준공되는 오피스텔만 32개동 6,338실이며 이는 '오피스텔이 도시형 부동산상품으로 각광'받고 있다고도 이야기한다. 1992년 3월 기사에는 '현재의 집값 구조로서는 오피스텔 부부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부동산 투기로 집값이 너무 올라 젊은 세대가 자구책으로 찾은 것이 오피스텔'이며 이는 신혼과 맞벌이 가정에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분석도 있었다. 1994년 5월의 매일경제 기사는, 업무용 빌딩에 비해 임대료가 싸고 주거와 업무를 동시에 할 수 있으며 신세대 감각에 부합된다는 점을 오피스텔의 장점으로 언급하면서도 업무시설도 주거시설도 아닌 어정쩡한 공간인 탓에 도박판이나 범죄자들의 은닉처, 무허가 유흥업소로 변칙 이용되고 있다는 분석도 덧붙였다. 과잉 공급이다, 새롭게 각광받는 주거 형태다, 등등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나산이 일원동에 오피스텔 분양에 나선다는 소식이 나온 것이 1994년 봄이었다.


창업자의 고향인 함평군 나산면과 같은 이름의 이 회사는 조이너스, 꼼빠니아로 대표되는 나산실업의 성공으로 본업인 의류업 외에 건설업과 유통업으로 사업영역을 넓힌 상태였다. 자신들이 만든 옷을 팔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짓기 위한 사업 확장이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에 맞추어 이 회사들의 집단은 나산그룹으로 불리우기 시작했다. 물론, 1998년 즈음- 오피스텔이 준공되고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부도처리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 했을 때이다. 오히려 미씨 860 오피스텔 외에도 다른 오피스텔이며 백화점이며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는 타이밍이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1994년 4월 29일 매일경제 광고


* 1995년 3월 16일 매일경제 광고


나산은 미씨 860을 분양하며 한 건물 안에서 모든 편의시설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웠다. 스포츠센터, 식당가, 수퍼마켓, 금융시설과 병원, 판매시설 등을 저층에 배치하고 지상6층부터 26층까지는 오피스텔로 분양했다. 평당 360만원. 신문 광고에는 이 오피스텔이 '이런 분'에게 좋다며 소개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는 독신남녀. '나만의 자유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개성파를 위한 공간'. <접속>의 동현(한석규)이 여기에 딱 맞는 케이스가 아니었을까. 라디오 PD를 그만두고 한창 자유롭게 살고 싶은. 당시의 방송국이라면 여의도 또는 그 주변이었을텐데(교육방송 PD는 아니었겠지) 개포동이라면 여의도와도 적당히 거리가 떨어진 것이 새로운 출발을 하기에 적절하기도 하다.


준공시점이 1997년 5월 21일이고 <접속>의 개봉이 같은 해 9월이니 한석규가 집을 꾸미는 장면은 정말로 새 출발을 하듯, 막 입주를 시작한 오피스텔에서 찍은 것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씨 860은 2004년 대청타워로 이름을 바꾸었다. 90년대 말 부도가 난 나산그룹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서? 아니면 한 때 유행어였던 미씨라는 단어가 너무 시대에 맞지 않게 보여서?)




1997년 입주 당시 이 오피스텔의 시세는 평당 200만원으로 평당 분양가의 약 56% 수준이었다. 임대의 경우, 16평형 전세가 3000~3500만원, 월세는 21평형이 보증금 1000만원에 60만원, 30평형이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100만원 선이었다고 한다. 동현은 월세였을까? 전세였을까? 그리 오래 살지 못하고 세를 빼야한다는 걸 미리 조금은 알았으니 월세로 얻었을까.



동현의 집은 일반적인 원룸보다는 넓어보였고 창 밖으로 대청아파트가 보였으니 대략 북서 또는 북동의 호실이라 추정되었다. 대략 구해본 동평면은 위의 그림과 같았다.(경매 물건 감정평가서를 참조하였다.) 실제 동현이 사는 것으로 나왔던 호실의 층은 알 수 없었지만 위의 21층 평면을 기준층 평면이라 가정하고(일단 저층부 평면과는 동일하였으므로) 2101호에서 2110호 사이 서향라인과 2133호에서 2137호 사이의 북향라인 중의 하나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동현이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고 붙이는 뒤로 2면 개방 창문이 등장했는데 찾아본 바로는 서향라인과 북향라인 모두 두 면에 창문이 붙어있었다. 2101호가 있는 서향라인은 요철이 있는 건물 형태를 따라 남서측과 북서측에 걸쳐 창문이 설치되어 있고, 북향라인 역시 요철을 따라 북서측과 북동측에 걸쳐 창문이 설치되어 있다. (모퉁이 세대와 끝 세대인 2137호와 2133호는 형태가 조금 다르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북향 호실이 서향 호실보다는 조금 더 넓다.


개략적인 평면도는 이렇다.


좀 더 상세한 단위세대 평면도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형세대는 없이 가장 많이 공급된 타입 두 종류에 대한 평면도만 있었다.




평면도 외에 A/B타입에 대한 투시도도 찾을 수 있었다.






동현이 창가에 서서 햇빛을 맞으며 폴라로이드로 셀카를 찍고, 직각으로 난 2면의 창문(!) 너머 경치를 바라보는 것이 가능했을 평면이었다. 요즘도 그렇지만 이러한 소형 주거의 경우 3미터 내외의 1면으로 개방된 창호 외엔 설치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편복도이건 중복도이건 복도식으로 각 세대를 꽉 채워넣다보면 계획할 수 있는 건 복도와 평행한 방향의 창문, 그것도 딱 해당 세대의 폭과 동일한 폭의(대부분은 그보다도 작음) 창문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세대 채광을 좋게하거나 복도 북측에 붙은 세대의 북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똑같이 복도식으로 계획을 하되 세대 전면의 방향을 틀어 건물 전체적으로는 요철이 있는 형태의 동평면으로 계획하는 경우도 있다. 동현의 오피스텔, 미씨 860이 그렇다. 일반적인 원룸 크기의 오피스텔이지만 전면부가 꺾여있어 비슷한 규모의 다른 오피스텔 호실에서는 볼 수 없는 2미터에 가까운 폭의 창문을 더 얻을 수 있었다. 동현은 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마주하며 짐짓 쿨하게 폴라로이드를 찍지 않았을까.



신기하면서도 당연한 건, 분양당시 홍보한 것처럼 지금도 1층엔 수퍼마켓이 있고(이마트 에브리데이) 지하엔 스포츠센터가 있다는 것. 은행도, 병원도, 식당가도 모두 있다. 정직한 홍보! 부동산 매매 사이트의 홍보문구엔 '수영장, 헬스클럽, 식당가'를 부대시설로 적어놓고 있으며, 동현의 방에서 보였던 녹색의 풍경처럼 '마루공원 전망'도 매물 상세설명에 등장한다.


영화가 개봉 20년이 넘은 것과 같이 이 오피스텔도 입주 후 20년이 훌쩍 지난 터라 실제 나온 매물은 올수리를 강조하고 있다. 네이버 부동산 기준 시세는 전용 32제곱미터(약 9.6평) 기준 1000/65. 매매가는 실거래가 기준으로 최근에 거래된 가격이 2억1천만원에서 2억3천만원 사이로 월세 가격을 생각하면 소위 말하는 수익률은 그리 높지 않다. 그래도 실거래가가 처음 등록된 2006년의 가격은 7000만원 수준이었으니 1997년부터 2006년까지 약 2배로(분양가가 3000~3300만원이었으니), 그 후 지금까지 다시 2배가 넘게 오른 가격이었다.




한편, 이 오피스텔은 분양당시부터 지하철 대청역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었다. 요즈음도 불변의 진리는 역세권. 오피스텔이라면 더욱 더 그래야 한다. 동현은 역세권에 위치한, 아니 역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이 오피스텔의 장점을 십분 활용하였을까. 수현(전도연)을 만나기 위해 대청역에서 3호선을 타고 한번에 종로3가역까지, 그리고 바로 계단을 통하여 피카디리 앞으로 올라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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