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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평리이평온 Sep 01. 2022

1-01. 일렁이다

불타버린 마흔 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 日記  

  

얼굴에 뾰루지가 막 돋아나고 있다.

이게 뭔 말이냐면,

스트레스가 엄청 심하다는 말인데,

마셔대는 커피

책상밑 쓰레기통 가득 쌓인 종이컵 부피마냥

부풀어 오른다.     

나도 내 얼굴을 책임지고 싶다.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잘 생겼다는 말보다

인상이 참 선하다라는 말을 듣고 싶은데,     

요즘같이 산다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그래도 바울은

오늘도 무릎을 꼿꼿이 세워서

저는 다리도 낫도록

씩씩하게 걸으란다.



01. 일렁이다          


평소와 다름없던 하루였다. 봄이 무르익어 나른한 날이었다. 기지개를 켜면서 바라본 창밖의 햇빛은 포근하고 따사로워 보였다. 이날도 어김없이 야근을 했다. 퇴근 후 아내와 거실에 나란히 누워 잠든 세 아이들을 바라보며 늦은 이야기를 나눴다. 무덤덤한 어제와 같은 일상이었다.     


“누구네 알지? 제주로 한달살이 간다더라!”     


큰아이 친구네의 소소한 근황이었을 뿐이었다. 여느 때면 기억의 편린으로도 남지 않았을, 그저 귀를 스쳐 지나갈 말이었을 텐데, 이날은 왠지 연못에 툭 던져진 조약돌 마냥 동그란 파문을 내다가 점점 큰 일렁임으로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무척이나 간절했지만 하루의 휴가마저 사치 같던 나에게 제주에서의 한달간 휴식이라는 말은 다다를 수 없는 비현실적 영역에 속한 것이었다. 갑자기 친근했던 이웃이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12년 넘게 일하던 회사에서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의욕적으로 일했던 것들은 안 좋은 쪽으로만 흘러갔다. 계속 흘러 고이는 일들을 밤과 주말에 남아 퍼올려 보았지만 더 스미고 고일 뿐이었다. 쌓인 찌꺼기들은 가라앉았고 나를 더 옭죄어 왔다. 맑아 보였다가도 누군가가 막대기를 들어 휘저어 버리면 밑바닥에 고인 침전물들은 구정물이 되어 훅 올라왔다. 늪에 빠져든 것 같았다. 에너지는 이미 고갈되었다. 아침마다 출근하기 위해 안간힘을 낼 때마다 햇볕에 한참을 널어둔 수건을 쥐어짜는 느낌뿐이었다.   


화창했던 5월. 그것도 어린이날이었다. 큰 행사를 준비하던 때라 부서 모든 팀원이 나와 일을 해야 했었다. 분주했기에 여유가 없었다. 아이들이 제법 기대했을 어린이날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 같이 놀아줄 시간은 언감생심이었다. 세 아이들과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라 조용히 아파트 문을 나서려 했는데, 아이 엄마가 급히 나오더니 봉투 한 장을 손에 꼭 쥐어 주었다. 삐뚤빼뚤 쓴 글씨였지만 큰 아이와 둘째 아이의 마음만은 또박또박 적힌 알록달록한 편지였다. 


평상시라면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또박또박 적었을 응원 문구에 힘을 얻어 하루내 열심을 내어 일했을 텐데, 이미 일렁이던 마음이라 아이들 편지는 더 큰 돌멩이가 되어 파문만 만들 뿐이었다. 올림픽 도로를 달려 사무실 책상에 앉았는데도 마음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쉴 새 없이 돌려야 했던 삶의 쳇바퀴에 대한 회의감이 훅 일었다.



‘무엇 때문에 이처럼 열심을 내어 달리고 있는 거지?’   

  

“제주 여러 마을이 작은학교를 살리기 위한 주택임대 사업을 하고 있대. 아이들이 작은학교에 다니는 조건으로 마을 빈집을 고쳐 다자녀 가정에게 싸게 빌려주나 봐.”     

제주 읍면 지역의 작은학교들은 학생수가 감소하자, 학생들을 유치할 요량으로 마을과 함께 정부 지원을 일부 받아 낡은 집을 고쳐 저렴하게 임대하는 ‘작은학교 살리기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미 제주 이주 바람이 불고 있었기에, 빈집이 있다는 공고나 입소문이 나면 외지인들의 신청으로 바로 바로 마감이 되고는 했다.

      

서울에서 제주로 전근한 중학교 선생님이 운영하는 블로그를 통해 제주 성산의 온평리라는 마을에도 위와 같은 빈집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게시글에는 마을과 학교의 여러 정보 외에도 온평초등학교 사진들이 몇 장 첨부되어 있었다. 파스텔 빛으로 알록달록 단장된 교정이 마음에 쏙 들었다. 운동장에는 천연잔디가 깔려 있었고 교정 뒤편에는 연꽃이 아름 핀 연못과 고즈넉한 솔숲이 숨겨져 있는 작고 예쁜 학교였다. 학생 수도 많지 않아 학년당 열 명 내외의 아이들이 다닌다고 했다. 아파트 숲에 둘러싸인 도시학교에 다니던 우리 아이들이 예쁜 이 학교에 다니며 뛰어노는 상상만으로도 우리 부부에게 설렘이 깃들었다. 꿈을 꾸니 행복했다.



‘이미 계약이 끝났다는데요!’라는 댓글이 달려 있었지만,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고 싶은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었다. 소심하게 건넨 문의 전화였는데, 제주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크고 씩씩했다.     

“아이들 학교 문제를 전화로만 할 수 있수꽈? 

온평리 오게 마씸, 면접 한번 봅써.”     


철망 안에서만 살던 다람쥐는 굴려도 끝이 없던 쳇바퀴에서 내려와 철망 문을 열고 다른 세상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늘 소망했지만 감히 행하지 못했던 삶으로 방향을 바꿔보기로 했다.     


이튿날 무작정 휴가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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