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마흔 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평일, 회사에 가는 대신 아내와 함께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기분이 묘했다.
먹구름은 아니었지만 구름이 잔뜩 껴 날이 흐렸다. 비행기는 가파르게 솟구치더니 이내 창공을 날았다. 쨍한 햇빛이 비행기의 차창에서 파편처럼 부서져 내렸다. 신기했다. 날씨는 변한 건 하나 없는데, 구름 밑과 구름 위가 이렇게 다르다니. 작은 창에 이마를 바짝 대어 빼꼼 아래의 풍경을 내려 보았다. 금세 제주공항에 내렸다. 제주도 역시 흐린 날의 잿빛 풍경이었다. 콕 집어 묘사할 문장을 찾을 수 없었지만 내 마음과 똑같다고 느꼈다.
성산읍 온평리는 꽤 먼 거리에 있었다. 공항에서 47km. 족히 한 시간 넘게 가야만 했다. 렌터카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길을 나섰다. 시내를 벗어나 큰 대로에 접어든 후 한참을 가다 왼쪽으로 꺾어 오름 사이로 난 길을 달렸다. 오름들은 엄마가 시골 고향집에서 내놓는 고봉밥처럼 소복했다. 생경해서 자꾸 기웃거리게 하는 낯선 풍경이었다. 여행 삼아 왔다면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했을 풍경이었지만, 웃을 수 없었다.
‘여보소 공중에 저 기러기 열십자 복판에 내가 섰소. 갈래갈래 갈린 길, 길이라도 내게 바이 갈 길은 하나 없소’
문득 학창시절 문학 교과서에서 읽었던 김소월의 길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어렴풋한 기억으론 파도는 잔잔했던 것 같다. 온평 포구가 보이는 작은 찻집에서 초등학교 운영위원회 부위원장님을 만났다. 성산에서 맛집으로 유명한 큰 식당을 운영하는 부위원장님은 마을과 학교의 마당발 같은 분이었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우리 부부 모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면접을 봤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떤 면접보다 떨린 순간이었다. 달라 하지 않았는데도 부위원장님께 회사 명함을 드렸다. 경찰서에서 깨끗한 범죄경력회보서도 한 부 떼어서 왔다. ‘처음 뵙지만 마을에 폐 끼치지 않을 나름 선량하고 괜찮은 사람들입니다’라고 어필하고 싶었다. 대화 중 잠깐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을 이용해 찻값도 계산했다.
다행히 우리 부부를 마음에 들어 하신 눈치였다.
“삼춘. 어디 갔수꽈?”
“무사? (왜?)”
“아래층에 세들 사람들 육지서 내려와신디, 집 좀 보게마씸”
집주인이신 노부부는 출타 중이셨는데, 우리의 새 보금자리가 될 수도 있는 집이 무척 궁금했기에 양해를 구하고 집구경에 나섰다. 세 들 집은 마을 복판에서 바당으로 향하는 안길에 있었다. 수도가 놓이기 전 마을 주민들의 식수원이었던 내통우물이라는 마을 공동 우물이 보존되어 있었고, 나름 마을 중심이라 나들가게인 코사마트가 자리했다. 진머리방이라는 소박한 미용실도 이웃해 있었다.
동네는 정겨웠고 푸근했다. 제주스러운 돌담과 미깡밭, 알록달록한 지붕을 얹은 돌집이 넓은 도로 주변에 펼쳐진 개량된 제주의 큰마을이었다. 삶의 방향을 바꾸고자 새길을 나섰지만 갈피를 잡지 못하던 우리 부부에게 온평리는 따뜻하고 평안하다는 이름처럼 안도감을 주었다.
제주돌담은 아니었지만 시멘트 블록을 반듯하게 쌓아 담을 둘렀고 기와지붕을 얹은 큰 철제 대문으로 드나들 수 있는 적벽돌로 견고하게 지은 이층집이 우리를 품어 주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이 있었고 푸른 잎을 잔뜩 머금은 금귤나무가 서 있었다.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주인집 할아버지가 직접 일구신다는 미깡밭이 있었다. 키는 작지만 잎을 무성히 낸 귤나무들이 정갈한 모습으로 도열해 있었다. 과수원을 보더라도 주인집 할아버지의 성품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집의 일층은 원래 귤 컨테이너며 농기구를 보관하던 너른 창고였는데, 반을 뚝 나눠 왼편을 우리가 살 집으로 개조해 놓았다. 도시서 살던 아파트의 반 정도 되는 십여평의 작은 크기였다. 그래도 방 두 개와 주방 겸 거실, 화장실 등 나름 살림집의 구색을 갖춰 놓았기에 충분히 다섯 식구가 부대끼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이 눈에 익자 스르르 긴장감과 불안함이 사라졌다. 그리고 삶의 방향을 바꿀 용기도 용천수처럼 솟아났다.
육지와는 다르게 제주는 연세로 집을 빌린다 했다. 1년치 세를 선불로 내는 개념인데, 다행히 지원이 있어 저렴했다. 한달 20만원 정도에 해당하는 연 250만원을 내고 이 집에서 살기로 계약했다. 단, 한 달 내로 이사를 와서 아이들을 전학시키라는 조건이 붙었다. 마을에서도 하루빨리 작은 학교에 아이들이 북적이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몇 개월 여유를 두고 도시 생활을 마무리하고선, 2학기 개학 전에 입도하려는 희미한 계획은 어그러졌지만 어찌보면 더 잘된 일 일수도 있겠다 싶었다.
쇠뿔도 단숨에 빼라는 속담처럼, 배지근해서 주어진 길만 걸었던 나에게 무턱대고 저지르는 일이 무척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일 테다.